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 1 “이수야 어쩌면 좋니.. 이세가.. 흑흑..” 어머니는 눈물로 말을 잊지 못하셨다.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병실에 누워있는 나와 똑같은 얼굴의 이세. 거울처럼 닮은 얼굴.. 그래서 12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학교옥상에서 떨어졌다는데.. 난 모르겠다. 이세가 왜 자물쇠로 잠겨있다는 학교옥상에 올라갔는지..” 내가 6살 이세가 5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셨다. 장남인 나는 아버지와 이세는 어머니와 살게 됐다. 그땐 이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열밤만 지나면 이세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할머니말만 믿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진학하기 전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걸로 끝이였다. 나는 죄책감에 눈을 감았다. 12년 동안이나 그리운 척 하기만 했던 내가 바보 같아서..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 어떻게든 올 수 있었을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잊고 살았다. "나는.. 나는 이세가 없인 못살아.. 우리 이세가 그 높은 곳에서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을까.. 우리 이수 멀리 보냈을 때 난 눈물은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이세는 나랑 같이 있으니.. 우리이수만 늘 가슴 아팠었는데.. 그걸 우리 이세가 알았던 걸까? 그래서.. 나한테 말도 못하고 그렇게 독한 마음 먹었을까?" 어머니의 오열도 눈물도 이세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바닥으로 쓰러지시는 어머니의 소리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세의 눈도 떠질 생각을 않는다. "그만해요, 그러다가 당신도 쓰러지겠어." 이세의 새아버지인 아저씨가 결국 어머니를 데리고 병실을 나가셨다. 그리고 잠시후 혼자 돌아오셨다. "네 얼굴을 보니까 이세가 더 생각 나는 모양이다." 아저씨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신다. "네.. 이세가 왜 그랬는지.. 아저씨는 아세요?" 아저씨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가 이세를 한번 쳐다버시며 입을 여셨다. “경찰들 말로는 집단따돌림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그걸 증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법적인 처분이 힘들다고 하는구나. 만약 증명한다고 해도 모두 미성년자인데다 학생이니.. 휴.. ” 집단따돌림? 이세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집단따돌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이지메는 일본에서도 큰 사회문제로 어느 집단에서든 이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학교 내의 이지메 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고 법적인 처분이 거의 전무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살인을 한다하더라도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정도는 조금씩 틀려도 한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에서 당장이라도 피가 터져 나 올 것 같았다. “이세가 집단따돌림을 당했다는 말이 정말인가요?” “이세가 학교옥상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세와 같이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데.. 아마 그 아이가 주도였던 모양이야.” “누구죠? ”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어.” 아저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기른 정이 무섭다더니 그새 아저씨는 이세의 아버지가 되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어머니가 걱정되신 아저씨가 자신의 말은 듣지 않는다며 어머니를 모시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 있으라며 열쇠를 내주셨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서 좀 쉬세요. 그래야 내일 또 병원에 가죠.”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고개만 끄덕이시더니 침실로 들어가 억지로 눈을 감는 것을 보고나서야 침실에서 나왔다. “휴 - 이제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내야겠지?”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아야했다. 이세의 방은 이미 경찰들이 뒤졌는지 엉망으로 흩어져있었다. 나는 반대로 차곡차곡 물건들을 정리하며 단서를 찾았다. 마음이 여리고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맑은 눈동자와 환한 웃음으로 사랑받던 아이였다. 어린시절 심장병으로 병원을 전전하던 내게 이세는 좋은 친구였다. 하얀색의 네모난 병실과 익숙해지지 않는 소독약냄새. 이름외우기가 바쁘게 바뀌던 간호사누나들. 잠이 부족해 금방이라도 나보다 먼저 쓰러질 듯 위태로우시던 어머니. 의사의 '조금만 더 힘내자'가 몇 년을 더 계속가고 얼굴을 잊을 법하면 한번씩 찾아오시던 아버지. 변하지 않는 건 이세의 맑은 눈동자와 환한 웃음소리뿐이였다. 미국에서 받은 두 번의 큰 수술과 일본에서의 이식수술 성공으로 지금은 완치했지만 그땐 정말 하루하루가 무섭고 힘들었었다. 내일이 끝일지도 모른다.. 모레가 끝일지도 모른다.. 6살 어린 꼬마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확실하고 두려운 존재였었다. 그때 느낀 두려움은 지금도 잊혀지거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내 심장에 박혀 뛰고 있다. - 형, 너무 깊이 잠들면 안돼. 이세는 내 손을 꼭 쥐고 매일 밤 기도하는 것처럼 말했었다. 그 손이 이세의 힘을 내게 나눠주는 것처럼도 느꼈다. - 형, 깨어있는 거지? 귀찮기도 했지만 꼭 쥐어진 작은 손이 나는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세가 나의 손을 필요로 할 때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죄인다. 평생 갚지 못할 죄를 지었다. “반드시 찾아서 똑같이 만들어주마.” 눈물이 결국 바닥으로 톡-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끝을 모르고 바닥을 적신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세야.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 결국 새벽녘이 되서야 이세의 방을 다 치울 수 있었다. “일기장도 없고 유서도 없어.”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충동적이였거나 타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 겨우 찾은 단서라고는 ‘그 놈을 죽이고 싶다’라고 수학책 구석에 작게 적어놓은 메모가 전부였다. “결국..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군.” 옷걸이에 깨끗하게 다림질되 걸려있는 교복을 한번 쳐다봤다. "어이, 내일부터 잠시동안은 나랑 같이 등교해야겠다." 결심은 이미섰다. 어머니와 아저씨가 말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이수야, 일어났니?” 방문을 열고나오자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방은 보글보글 찌게 끓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로 가득하다. “아침은 빵이 좋으니? 아님 밥으로 할까?” 애써 웃으시면서 나를 돌아보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교.. 교복? 무슨 짓이니 이수야?!” 이세의 교복은 내게 꼭 맞았다. 서랍에서 찾은 이세의 은색테 안경까지 쓰고나니 정말 몰라보겠는걸? 평범한 하얀 와이셔츠에 흰색 티, 검은색 바지. 머리까지 똑같이 잘랐더니 누가 봐도 감쪽같다. “학교에 갈래요.” “학교라니.. 무슨학교? 설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라.”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범인을 잡아서 이세 앞에 끌고 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나는 현관으로 나가 이세의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둘러맸다. “당분간 전 이수가 아니라 이세에요.” “그러다 너까지 다친다..” 무릎을 꿇고 오열하시는 어머니는 나마저 어찌될까봐 겁에 질리신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제 몸에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할 테니까.” 후훗 - 웃어 보이며 문을 나섰다. 내가 살던 워싱턴의 동내에선 동양인은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그래서 비웃음 비슷한 것을 받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주먹으로 갚아주곤 했었다. 덩치가 크다거나 그 애에게 형이 있다거나 수가 많다거나 나이가 나보다 많다거나 그러건 상관도 없었다. 그냥 몇대를 맞든 싸워야했다. 결국 내가 질걸 뻔히 아는 싸움도 했었다. 아버지는 내가 맞고 들어와도 애를 패서 그애의 부모가 찾아와도 별 상관을 안하셨다. 그냥 '내일 학교에 가야지. 숙제하고 자라.'이 말이 끝이였다. 다시는 싸우지 마라도 말도 맞고 들어오지도 마라는 말도 아니고 그냥 기계처럼 그 시간에 그 말을 하셨다. 결국 내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있었다. 지금 내게는 나대신 울어주시고 나대신 웃어주시고, 화내주시던 어머니도 곁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직 내 자존심을 지키키 위해서 싸웠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인가 주먹질을 하고 다니자 덩치가 큰 운동부의 상급반 얼간이들이 찾아와서 버릇을 가르치겠다며 4, 5명에게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아픈 것 빼고는 괜찮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잘못했다고’ 빌어서 자존심을 다친 것 보다 차라리 맞는 편이 편하다. 몸에 난 상처는 금방 나으니까. 뭐 아프다고 해도 죽을 만큼 아프지도 않았다. 나는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게 뭔지 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서서 느끼는 두려움이 뭔지 안다. “다 때렸냐? 이 정도로 나한테 버릇을 가르쳤다고 하는 건가?” 내 말에 상급반 얼간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리고 얼간이들 중에서도 키가 제일 큰 얼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쿡- 쿡쿡쿡쿡- ”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며 입술에 피를 소매로 쓱 닦았다. 곱슬거리는 짙은 금발에 깊고 푸른 회색눈동자. 엄마가 쓰던 흰색 분이 날릴 것 같은 피부색. 백인의 표본쯤 되는 녀석이군.. 나이에 비해 키도 빌어먹게 크고, 쳇! “너 이름이 뭐지?” 손수건을 내민다. 나는 무시하고 벽에 기대어 간신히 일어섰다. “내가 왜 가르쳐줘야하지? 너한테 난 버릇없는 유색인종이 아니였나?” “친구가 되고 싶어.” 그의 말에 다른 얼간이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아무도 반발하거나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제 보니 이녀석이 대장이였군. “내 이름은 지미 리델. 넌?” 지미는 손수건을 내 손에 쥐어주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는 피식 - 웃으며 지미의 손을 잡았다. “한이수.” “좋아, 한이수. 다시는 아무도 널 유색인종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다. 약속하지. 넌 내 친구 한이수다.” 웃는 모습이 이세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미는 나보다 4살 많았는데 내가 월반을 계속하는 바람에 이 일이 있고 반년 후에는 나와 같은 반이되었다. 그때 녀석의 표정이란.. 후후.. 결국 녀석과 나는 질긴 인연으로 10년을 붙어 다녔다. 이식수술을 위해 일본에서 2년 동안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내가 먼저 그 학교짱인가 뭔가 하는 자식을 찾아가 버릇을 가르쳐줬지만. 일본은 이상하게 같은 동양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백인들한테는 쩔쩔매면서.. 이상한 녀석들. 기선 제압하고 나니까 일본에서는 살기가 무지 편했다. '사쿠라고의 싸이코 한'으로 통했으니까. 깔깔깔 - 결국 모든 싸움은 기 싸움이다. 기에서 밀리면 이길 수 있는 상대와 싸워도 진다. 겁을 먹기 때문이다. 그걸 계속해서 극복 못하면 트라우마나 징크스가 되는거겠지?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3 이세는 옥상에서 떨어진 후 3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었다. 아직까지 의식이 없지만.. 나는 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하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뛰어왔다. 그러니까 이세의 교복은 3달 만에 학교에 등교하는 꼴이 되는 거다. “흠 - 운동장이 좁아 터졌군.” 그리고 의식적으로 옥상에 눈이 갔다. 빨간 벽돌의 5층 건물. 이세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예전에 이 학교에서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학생이 있었다는데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고 했다. 나는 힘차게 교무실로 걸어갔다. 담임은 나를 보고 엄청 놀라는 눈치였고 허둥지둥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너.. 계속 이 학교에 다닐거냐?” 귀찮다 이거지? 후 - 이런 걸 선생이라고. “네. 그럴 생각입니다. 계속 도망만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머리를 많이 다쳐서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거든요. 아이들에게 잘 설명해주십시오.” “네가 정 그렇다면..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전학갈 각오를 해라." 담임선생은 출석부를 챙겨들고는 교실로 갈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나를 혼자 교실에 보내기는 불안한 모양이다. 교실은 시끌벅적 했고 그 분위기는 나의 고등학교 생활과는 좀 틀린 느낌이다. 선생이 문을 열자 교실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고 나를 보자 아이들은 귀신을 보는 것처럼 놀라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이세가 이제 다 나아서 오늘부터 등교를 하기로 했다. 학교옥상에서 떨어진 불의의 사건을 두고 말이 많은데 사고였으니까 소문 계속 만들어내지 말아라. 그리고 이세가 머리를 다쳐서 드문드문 기억이 안난다고 하니까 신경들 쓰고. 반장, 넌 책임지고 데리고 다녀라. 그럼 조례는 마친다.” 나는 교실에 비어있는 책상으로 가 앉았다. 제일 끝줄에 혼자 있는 책상. 그렇게 큰 키가 아닌데 마지막 줄이라니.. 그것도 혼자라니 외로웠겠다... 우리이세.. 책상 위에는 온갖 말이 적혀있었다. 컨닝를 위해서 도배해 놓은 흔적이며 누구는 누구를 영원히 사랑한다느니 그리고 칼로 정성스럽게 H. J라고 파놓은 흔적. 제일 최근께 이 H. J로군. 이름의 약자일까? 나는 서랍 속에도 손을 넣었다. 텅비어있다. 여기도 단서가 될 만한 건 없군. “야, 한이세. 병원에 있더니 계집애 같던 얼굴이 더 반들반들해졌네? 혹시 꾀병이였냐? 킥킥 - ” “이 새낀 워낙에 엄살이 심해서 그럴지도 몰라.” 얼굴에 나. 불. 량. 이라고 쓰여진 사내녀석 둘이 주위를 애워싼다. 흠-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서 둘을 밀치고 교실을 나갔다. 뒤에서 “저 새끼가 약을 먹었나?!”하며 한명이 쫓아온다. 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고 녀석도 곧 따라 들어왔다. “나 찾냐?” 방긋 웃어보였다. “이 새끼가 미..” 퍽 - 말을 다 뱉기도 전에 얼굴을 발로 걷어차서 비틀거리는 사이에 머리채를 붙잡아 화장실 문을 열고 양변기에 처박아버렸다. 그리고 발로 지긋이 눌러줬다. “웁 - 이 새.. ” 허우적되길래 발로 더 세게 눌러줬다. 숨이 막히는지 손을 퍼득이길래 숨쉬라고 물을 내려줬다. 켁 켁 - 숨한번 요란하게 쉬는군. “놔.. 놔 . . 줘.. 이러다가 죽겠어.” 지 목숨 귀한 줄은 아는 모양이군. “이정도로 사람이 어떻게 죽냐? 응? 5층정도 되는 건물에서는 떨어져야 죽지? 아참, 그것도 엄살이 심한 거였지?” 나는 머리채를 들어올려서 배를 발로 한번 더 차고 다시 양변기에 처박아버렸다. “너 평소에 나한테 어떻게 했냐?” 꾹 눌러서 좀 담궈줘다가 다시 머리채를 들어올렸다. “헉.. 켁.. 사.. 살려줘..” 배가 아픈지 배를 감싸쥔다. 나는 씩 웃으면서 배를 한대 더 걷어찼다. “어떻게 했냐고 새꺄?!” “사.. 살려줘.. 살려줘.. 이세야..” 이번에는 땅바닥에 팽게쳐서는 마구 밟았다. 내 취미가 때린데 또 때리기다, 이자식아. “이 새끼 말귀가 어둡나? 나한테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사.. 살려줘.. 잘못했어.. 잘못했어.. ” 이제 울면서 하소연한다. “아, 짜증나. 지미도 나한테 두 번 이상 묻게 안하는데 이 새끼가.” 실컷 패고 있는데 화장실로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승강아? 어딨냐?” 교실에서 나를 애워싸던 두명 중 나머지 하나인가 보군. “야, 니 이름이 승강이냐?” 물어볼려고 땅바닥에 널부러진 녀석을 쳐다보니 이런.. 벌써 기절한 모양이군. 뭐 나머지는 저 녀석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4 나머지 녀석에게서 내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승강인가 하는 녀석과 똑같이 만들어주고는 그냥 화장실에 던져두고 왔다. 이 두 녀석은 이세를 괴롭히던 주범은 아닌듯했다. 사람을 옥상에서 떨어져 죽게 할 정도로 괴롭힐 머리도 없는 녀석들 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3학년선배들에게 찍혀있었잖아. 매일 3학년들이 번갈아 부르고 그래서 자주 수업도 빠졌었고.. 정말 기억 안나?” 하며 조심스럽게 묻는 녀석의 얼굴을 밟아주며 “그래, 기억 안나다.” 계속 읇으라고 했다. “너 얼굴 때문에 재수없다고.. 2학년들도 보기만하면 침뱉고.. 우리는 그냥 너.. 조금 아주 조금 괴롭힌 것 밖에 없어.. ” 교실로 들어와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책을 펴고 수업을 들었다. 아- 옛날 옛적에 배웠던 것을 다시 들으려니 잠이 쏟아진다. 수학선생은 쉬운 문제를 너무나 어렵게 설명해서 피곤했고 영어선생의 발음은 정말 후졌다. 그래가지고 잘도 밥 먹고 산다.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점심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에 잠이 깼다. 일찍 나온다고 아침을 못 먹고 왔더니 배가 등짝에 붙어버릴 지경이다. 나는 얼른 매점으로 뛰었다. 100M를 10초대에 돌파하던 나다. 농구는 팔과 다리가 길어질 만큼 연습해서 체격의 핸디캡을 벗고 장거리 슛의 귀재(?)로 덩치만 큰 바보들을 재치고 언제나 주전 이였고 가고 싶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공부도 하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 1년이 넘는 막노동 아르바이트도 했다.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라면 두 그릇이요!” 차임벨이 울리자마자 뛴 덕분에 아직 매점에는 사람이 없었다. 라면을 두 그릇 받아서 한 그릇을 3분만에 먹어치우고 나머지 한 그릇을 먹으려는데 뒷통수가 싸늘하다. “야, 너 한이세 아니냐?” 입에 넣었던 라면 가락을 끊어내고 뒤를 돌아보니 분명 1학년은 아니였다. 올게 왔구만. 아 - 다 먹고 나서 왔으면 좋았을텐데. 입맛을 다셨다. “5층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얼굴도 박살난 줄 알았더니 멀쩡하네.” 머리 좀 감아라, 개기름이 줄줄 흐른다. 뭔 애가 이렇게 느끼하게 생겼담. “멀쩡하기만 하냐, 더 뽀샤시해진 것 같다. 니 그 기집애같은 쌍판이.” 그냥 지껄이는 대로 놔뒀다. 우선 이야기를 다 듣고 응징을 해도 해야지. “눈 안 깔아? 이 쌍년아.” 갈수록 가관이구만. 퍽- 하고 내 머리를 친다. 좋아, 이야기만 다 끝내라. “경은아, 너 뭐하냐?” 이 새끼 이름이 경은이군. 무슨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게. “중헌아. 이 새끼 등교했더라?” 내 멱살을 잡고 중헌인가 하는 사람에게 내민다. “이야 - 이 새끼가 왠 근성 있는 짓이람? 얼씨구나하고 전할갈 줄 알았더니?” “얼굴만 더 반지르르해져서 왔다. 3학년들이 무지 좋아하겠네. 선배들 졸업할 때 우리한테 그 사진 넘기고 가겠지?” 사진? 무슨 사진을 이야기 하는 걸까? 이세는 협박을 당한 걸까? “글쎄다. 난 별루 관심 없어. 장사나 할꺼면 또 몰라. 이 새끼 얼굴하나는 무지 반반하니까.” 중헌이 내 턱을 쥐더니 요리조리 뜯어본다. ‘진짜 멀쩡하네’ 뭐 이런 표정이다. “밥먹었냐. 경은아?” “아직. 야, 너 가서 정식두개 받아와라.” 멱살을 풀고 의자에 앉더니 내가 먹던 라면을 후루루 먹기 시작했다. 아까워 죽겠네. 매점에는 벌써 학생들이 버글버글하다. 이런 곳에서 싸워봤자 나만 손해겠지? 나는 얼른 도망치는 것처럼 매점의 출구를 향해 뛰었다. 그러자 라면을 먹던 경은과 중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쫓아온다. 역시 역시 - 얼른 매점 뒤에 있는 작은 공터로 뛰었다. 아침에 교무실에 들리기 전에 학교 내를 꼼꼼히 둘러봤었다. “야- 이 새끼가 겁을 상실했나?!” 나는 경은의 정강이를 차서 악-하고 쓰러진 사이에 손가락을 으깨버렸다. 으악 -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허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라면이 튀어나온다. 드런 새끼. “야, 나머지 너. 이리 가까이 와봐.” 중헌이 주춤한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뛰었다. “어쭈, 친구 버리고 도망을 치내?” 나는 경은의 손가락 두개를 신경질적으로 으드득 꺾어버렸다. 비명도 안나오는지 울면서 꺼억꺼억 거리기만 한다.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마, 새꺄. 그땐 정말 손목아지를 네 몸통과 분리시켜 버릴 테니까.” 기절하지 말라고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코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바지가 검은 색이라 다행이다. “아까 사진이야기 다시 해봐.” “무.. 무슨 사진.. ” 다행히 기절 안했다. “무슨 사진이라니, 아까 니가 말하던 사진이지.” 내가 씩 웃으면서 손가락을 밟아줬다. “으.. 으윽.. 하.. 하지마.. 그러다가 진짜 손가락 병신되겠어.. 흑. 그 사진이야 니가 더 잘 알잖아? 니 사진이니까.” “내가 머리를 좀 다쳐서 기억이 잘 안나거든?” “직접 본적은 없어. 3학년선배들이 잘 안다고. 그 사진만 있으면 너 시키는 대로 한다고.. 흑흑.. ” 흠- 이 새낀 별로 아는게 없구만. 좀 있으면 중헌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친구들을 우루르 몰고 올테니 그때 물어봐야지. 경은이 우욱- 하더니 라면을 전부 올린다. “우씨, 내 아까운 라면 지가 처먹더니 도로 뱉어?” 짜증이나서 그 새끼 얼굴을 그 위에다가 처박고 ‘다먹어’라고 했다. 머리를 지긋이 밟고 있는데 뭔가 우루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5, 6명 정도 되겠군.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손에 상처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5 오랜만에 정말 신나게 싸웠다. “점심시간 얼마 안남았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 너.” 여섯명 모두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아있다. “네.. 네?” “이름이 뭐냐?” 그중에서 제일 덩치 큰 녀석을 불렀다. “문동희입니다.” “싸우는 폼이 권투 좀 했겠던데 약한 애들 괴롭힐려고 배웠냐? 하여간 머리 나쁜 새끼들은 배운 걸 전부 그따위로 써먹는단 말야.”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얼굴에다 담배를 털었다. “꼽냐? 꼽으면 어쩔건데?” 그리고 중헌인가 하는 녀석 앞에 섰다. “너.. 아까 말하던 사진.. 그거 누구한테 있냐?” “3학년 선배 여럿이 가지고 있어. 누구누구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 “무슨 사진인데? 장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무슨 장사를 해처먹으려고 했냐?” “그냥.. 3학년들이 하던 장사.. 계속 하려고 했어.” “뭐 직접 보면 어떤 사진인지 알겠지. 3학년 한놈 잡아서 족치는게 더 빠르겠다. 아는게 없냐, 너희 새끼들은. 너희들 얼른 가서 내가 너 줘팼다고 일르고 와라. 알았냐?” 그리고 담배꽁초를 얼굴에 던져주고 일어섰다. “아참, 이세.. 아니 내가 옥상에서 떨어졌을 때 누가 옆에 있었다던데 누군지 혹시 아냐?” “방과후에 생긴 일이라서 우리는 학교에 없었어. 3학년들은 야자한다고 학교에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곱게 개어 넣고 매점으로 향했다. “입맛 좀 도네.” 뒤에서 미친새끼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놔뒀다. 매점에서 빵이랑 과자를 한 다발 사서 교실로 왔다. 5교시는 체육인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여, 승강아.” “으.. 응?” 친한 척 내가 부르자 겁을 먹어서 내 눈을 안볼려고 하는 녀석에게 빵봉지 하나를 던져줬다. “어차피 체육수업은 못들을 것 같은데 니 체육복 좀 빌려줘.” “여기.” 단번에 그냥 내준다. 짜식 머리가 아주 나쁘지는 않구만. “고맙다.” 내가 체육복을 가지고 내 자리로 돌아가자 반애들은 술렁술렁 말이 많다. 체육시간에는 농. 구.를 했다. 우하하하 -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하는 스포츠라니. 내 실력이 만천하에 다 들통나는 순간이잖아. 아, 부끄러워. 나는 내게 공을 던져주지 않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적군 아군 안 가리고 공을 뺏어서 슛을 했다. 전부 어이없어 한다. 선생조차도. 사실 농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난다긴다하던 내가! 이런 꼬맹이들의 발장난 피하는 것쯤이야 시쳇말로 누워서 떡먹기, 식은 스프 원샷 하는 것 보다 더 쉬웠다. 아이들은 내 쇼(?)에 감탄을 한 나머지 입 벌리고 다들 구경하기에 바빴다. 그 순진무구한 감탄의 눈빛에 흥이나서 혼자서 아주 슬램덩크를 찍었다. “와- 너 진짜 굉장하다. 농구 했었어?” 체육시간에 나한테 체육복을 빌려주고 견학을 하던 승강이 정말 보기 드문 순수한 감탄어와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본다. “아, 머리를 다쳤더니 뭐 별게 다 되네? 너두 한번 박아보지. 그럼 또 모르잖아, 그 멍청한 머리가 나처럼 똑똑해질지.” 승간이 얼굴이 뭐 씹은 얼굴이 됐다. 킥킥- 이 녀석 얼굴에 표정이 다 나타나네. 데리고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6 “교과서가 하나도 없군.” 이세이름으로 된 사물함에는 쓰레기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녀석이 좋아할만한 흔한 연예인 사진 한장도. 생각해보니 집에도 참고서만 가득했고 교과서는 수학책 하나뿐이였다. “전부 다시 사야겠군.” 헌책을 구하려면 못구할 것도 아니였지만 새것으로 구입하기로 했다. 이세가 건강해져서 내가 주는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서점에 가야겠군. 이래나 저래나 제일 만만한건 승강이뿐. 승강이에게 수업마치고 좀 보자고 했더니 움찔 놀라서 ‘왜?’라며 쥐구멍에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묻길래 ‘잔말말고 오라면 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아주 울상이다. 아, 너무 재미있어. 이상하게 2학년들의 반격 하나 없이 하교시간이 와버렸다. 자식들 덜 맞았나? 정문 앞에서 매복했다가 한대씩 더 패줘야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신발을 갈아 신는데 반장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2학년에 그 개망나니들이 계단에서 단체로 굴렀단다. 지금 전부 양호실에 뻗어있데.. 너두 그 경은인가 하는 자식한테 삥뜯긴 적 있다고 했지?” “사실 그 새끼들한테 한번쯤 해꼬지 안당한 1학년이 어디 있기나 하냐? “그런데 너무 웃기지 않냐? 단체로 7명이 데굴데굴~ ” 그게 뭐 그리 우스운 일이라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박장대소다. 흥- 그깟일로 양호실에 뻗어서는 내가 일러바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잊어먹었단 말이지? 담에 만나면 그 잘 잊어버리는 머리통을 좀 손봐줘야겠군. “왜 나한테 밥 사줘?” 경은은 너무 당황한 듯 내가 사주는 밥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한다. “책사는 거 도와줬잖아. 뭐 그다지 도움은 안됐지만.” 사실 이 녀석은 책과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이라 서점이 어딨는지도 모르고 또 어떤 책을 사야하는지도 몰랐다. 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데리고 온 내 잘못이지. “나, 너 괴롭혔는데? 많이..” 또 쥐구멍에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 “그건 어차피 기억 안나니까 오늘 두들겨 팬걸로 끝내자고.” “으응.. 고마워..” 그제서야 승강이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는 표정이였지만.. 책을 집에 내려놓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 상태로 계속 못 깨어나면 정말 위험하다는데.. ” 어머니는 오늘도 울고 계신다. 아저씨는 그저 어머니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계셨다. “퇴근하고 바로 오신거에요?” “이수왔니?” 아저씨는 까칠해진 얼굴로 나를 보고 웃으신다. “이수.. 우리 이수 안다쳤어?” 어머니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훑어보신다. 그리고 꼭 껴안으셨다. “안다쳤어. 멀쩡하지?” 내가 웃자 고개를 끄덕이시며 응.. 응 하시는데 눈에 눈물이 핑돈다. 한이세, 너 빨리 안 일어나? 너 때문에 나도 어머니도 아저씨도 이렇게 슬퍼하잖아. 어디선가 아버지도 슬퍼하실 거라구! 나는 저녁을 먹고 왔으니 불쌍한 아저씨 밥 좀 챙겨드리라고 막 뭐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와서 저녁을 굶으신 아저씨가 생각나셨는지 내게 병실을 맡기고 구내식당으로 내려가셨다. “하얀장미?” 분명 첫날 왔을 때는 이세의 머리맡에 붉은장미가 놓여있더니 오늘은 하얀장미가 꽃병에 얌전히 꽂혀있었다. 병실에 그것도 남자애가 입원한 병실에 왠 꽃이람 하고 의아해했었는데 뭐 이제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이, 병실에 잠자는 왕자! 공주가 와서 깨워줄 때까지 기다리냐? 공주님 이름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든 데리고 와줄께. 꿈속에서라도 찾아와 귓속에 속삭여. 난 네 이야기라면 어떤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 이세의 손을 꼭 잡았다. 내 기도가 네가 했던 기도처럼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깊이 잠들지마. 이세야.’ 졸린 눈을 부비며 학교에 가기 위해서 일어나는 나의 기특한 모습을 보고 ‘아, 정말 내가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구나’하는 실감이 났다. 어머니는 어제 병원에서 주무셨기 때문에 아침은 아저씨가 준비해주셨다. 거실 가득 잠을 깨우는 달콤한 향기와 병아리색 앞치마를 두르신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완벽하게 가정적인 아버지의 상이였다. “잘잤니?” 달콤한 향기의 주인공인 까만색 커피를 내미신다.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더 없이 상냥한 말투.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버림 받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버지에게 나는 피를 반쯤 물려준 그래서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는 아들 이였고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에게 피를 반쯤 물려준 철저히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였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따스한 마음만으로 가족이 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내 아버지는 아니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나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입에 토스트를 물고 시계를 내려다 봤다. 7시40분. 뛰면 지각은 면하겠군. 아저씨는 현관에 서서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걸 보고서야 출근준비를 하시러 집으로 들어가셨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7 교과서를 사물함에 잘 정리하고 어제 팬시점에서 구입한 아주 잘나간다는 여자연예인 사진과 스티커도 덕지덕지 붙여 놨다. “이제 고1짜리 사물함 같군!” 혼자 흐뭇해하면서 오늘 수업시간표를 훑어보고 필요한 교과서만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제일 마지막 줄이라 사물함이 가까워 편리하군. 뭐 그것 외에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콧노래를 부르며 연필을 칼로 깍고 있는데 슬리퍼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물함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그냥 연필을 2자루째 심혈을 기울여 깍고 있었다. “전부 새거네. 뭐야, 이썅년 사진은.” 뭔가 북 -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신경 안썼다. “야, 문재근! 너 그만 못해?!” 어디선가 승강이 목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연필 깍는 걸 멈췄다. “윤승강, 너 돌았어? 니가 감히 날쳐?” 오예- 싸움 구경났구나. 세상에서 제일 잼있는 불구경 다음가는 싸움 구경. 문재근이라는 녀석은 키가 180이 넘는 거구의 뚱보였다. 승강이도 한 덩치했지만 솔직히 완력에서는 딸려 보였다. 좋아라 구경하고 있는데 문재근이라는 녀석 손에 들린 반으로 찢어진 사진이 신경 쓰인다. “어라? 내가 사물함에 붙여놓은 사진이랑 똑같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세의 사물함으로 눈을 돌렸다. 이세의 사물함은 문이 열린 채 교과서는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야,문제근. 그만 못해? 승강이 맨 처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버렸다. 내가 무슨 지 소꼽친구도 아니고 저런 덩치한테 맞을 각오를 하고 편을 드냐?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문재근의 머리를 날렸다. 머리가 한쪽으로 심하게 꺾인다. 그리고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윤승강, 넌 갑자기 무슨 친구 흉내냐?” 승강은 씩- 웃어보인다. “야, 문재근. 남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댔으니 그 대가를 치러주셔야겠다. 근데 그것들 전부 이 내가 발품 팔아서 구한 것들이니까 넌 최소한 사망이다.” 문재근은 그래도 몸값을 하는지 인상를 팍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곰처럼 달려든다. 가뿐하게 팔꿈치로 그 미련한 놈 턱을 날려버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이 말이 이런 나를 보고 나온 말 아니겠어? 한판 승! 녀석은 그냥 나가떨어져서는 일어나질 못했다. 문재근의 졸개들도 그냥 넋을 놓고 보고만 있다. 원래 싸움이라는 게 우두머리만 쓰러뜨리면 기선 제압은 따놓은 당상이지. “야, 일어나.” 발로 머리를 쳐도 일어나질 못한다. 마지막께 너무 셌나보다. “그만해.. 한이세.” 승강이 나를 말린다. “왜?” “쓰러진 녀석 패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거라구.” 또 나왔다. 순진무구 눈동자. 안어울린다, 안어울려. 나는 승강의 말에 비웃음을 날리며 문재근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전부 눈이 휘둥그래진다. 100킬로도 넘어보이는 문재근을 이렇게나 가볍게 들어올렸으니 안놀라는게 이상하다만은. “오늘은 특별히 승강이 얼굴봐서 그만한다만은 복수한답시고 승강이나 나를 또 찾아왔다가는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어줄테니 알아서 하라고.” 문재근을 자신의 졸개들에게 넘겨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참!” 내가 교실이 떠나갈 듯 큰목소리로 벌벌 떨면서 우리 교실을 떠나려던 문재근의 졸개를 불렀다. “네.. 네?” “사물함 정리해 놓고가. 그리고 저 새끼한테 아까 찢은 사진 400원이라고 전해라. 꼭 전해. 까먹었다가는 그 머리통을 손봐준다고.” “네. 네.” 듣고 있던 승강은 결국 그 400원짜리 사진한장 때문에 화가난거냐? 하는 어의없는 표정이다. 헙- 어떻게 알았지. 나는 휘파람을 불며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커터칼로 다시 연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까만 가루로 변해 발치의 쓰레기통으로 떨어진다. 햇살이 하얗게 물드는 정다운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다. 우리 교실이 별일도 다 있구만.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8 “수학선생님이 음악실로 모이래.” 반장이 칠판에 커다랗게 ‘6교시 음악실로 이동’이라고 쓰고는 “책이랑 필기구는 챙겨오래.” 라며 교탁에서 내려왔다. 아이들은 투덜거리며 삼삼오오 음악실로 이동한다. 기지개를 쭉 펴고 나도 수학책과 노트, 필통을 챙겨서 나갈 준비를 했다. “음악실은 5층에 있어.” 어느새 승강이 말고도 현철과 민수녀석까지 제법 친구다운 녀석들이 몇 더 생겼다. 4명이서 장난을 치며 5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미처 앞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대충 들고 있던 책이며 필통이 계단을 나뒹굴었다. 옷깃에 초록색 배지를 보고 3학년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키 한번 무지 크네. 187쯤 되려나?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숙여가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상대방에게는 사실 별일 아니지만 시비를 걸려면 얼마든지 핑계가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곧 수업종이 울릴 시간이기도 하고. “한이세?” 뜻밖에 이름을 불렸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노려봤다. ‘3학년 선배 여럿이 가지고 있어. 누구누구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 어제 중헌이 지껄이던 말이 떠올랐다. 그 3학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시선을 땔 줄 모르는 나를 무시하고 그는 허리를 숙여 나대신 내 책과 노트를 주워들었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햇살에 붉게 물든다. 행동에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 없다. 왠지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청량한 느낌의 사람 이였다. 이런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다. 눈이 저절로 이 남자를 쫓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 누군지 모르냐?” 남자의 목소리에 문득 저쪽으로 날아가 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대단한 자신감인데 난 지금 우리부모님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거든?” 현철이와 민수는 내가 3학년한테 반말을 하자 눈치를 보며 옷깃을 잡아당긴다. 하지만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래? 이 수학책 내가 너한테 준거야.” 수학책을 들어 보인다. 그리고는 내 손에 쥐어준다. “수학책을?” 남자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지금처럼 너하고 부딪쳐서 내가 커피를 쏟았거든. 니 수학책에 말야.” “흠- 그런 일도 있었나?” 나는 애써 기억해내는 척 제스처를 취해보지만 당연히 기억 안 난다. “하.. 하하하하.. 너 한이세가 맞기는 한거냐?” “.........”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식은땀이 등에서부터 흐른다. 혹시 이세와 친하던 사람일까? 그래서 단번에 알아봐버린 걸까? 반갑기도 하고 또 왠지 섭섭하기도 했다. “나.. 내가 한이세가 아니면 뭐라는거야? 지금 내가 너 따위를 기억 못해낸다고 해서 한이세가 아니라는 건가? 건방진 생각이군. 내겐 너를 기억해내는 것보다 중요한게 얼마든지 있다고. 그것들은 다 기억나.”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는 정말 다행이라는 얼굴로 웃었다. 미소가 너무.. 눈이 부시다. 딩동댕- 6교시를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다음에 또 보자.” 뭔가 멈춰버렸던 것 같다. 뭐가 멈췄던 걸까? 내 머리가? 심장이? 이런 느낌은 처음이였다. 이세의 미소와도 지미의 미소와도 어머니의 미소와도 틀렸다. “이세, 너 한주선배랑 아는 사이였냐?” “잘 기억 안나.” 사실은 기억이 안나가 아니라 처음 만난거지. “저 선배 3학년 사이에서도 아웃사이더잖아. 여자애들 사이에서야 얼음골왕자님이니 뭐니 해도. 물론 잘생기기는 했지만. 차갑다고 할까.. 말걸기도 좀 무섭고. 같은 중학교 나왔다는 형준선배 정도나 스스럼없이 대하지 같이 다니는 다른 선배들은 말 걸기도 조심스럽다고 하더라.” “나도 그 중학교 나왔는데 그땐 한주선배가 형준선배보다 위였어.” “우리학교 짱인 형준선배보다? 이야, 보기보다 대단하네.” 민수, 현철이 승강이가 이야기 꽃을 피운다. 지들이 무슨 아줌마야 뭐야?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9 수학시간에는 이상한 영화를 한편 봤다. 어떤 천재수학자의 이야기였는데 정말.. 졸렸다. “디게 재미없네.” 하교길에 매점에 들려서 라면을 시켰다. “너 진짜 두그릇이나 먹을 수 있냐?” 대답대신 씩- 웃어보이고는 예의 그 속도로 3분만에 라면 한그릇을 비웠다. “헉-” 승강이 정말 말도 안돼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 뿌듯해. ‘나머지 한그릇은 2분만에 먹어야지’ 하고 젓가락을 드는데 그 자식들이 보였다. “야! 승경, 중헌”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별루 반갑지 않은 가 보다. 얼굴이 사색이 되서는 후다닥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야! 어디가!” 식당의 식탁들을 한손으로 훌쩍 뛰어넘어서 절뚝거리며 가는 녀석들의 목덜미를 쥐었다.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냐? 그렇게 사색이 되서 도망가? 응??” 승강이 ‘무슨 일이야?’하는 표정이다. “승강아, 내 라면 잘 사수하고 있어. 한 젓가락이라도 먹으면 지옥까지 쫓아간다.” 살벌한 표정으로 내가 먹을 것에 대한 집념을 보이자 승강이 오버하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귀여운 녀석. 나는 둘을 끌고 매점 뒤의 공터로 갔다. “자주 보니까 좋네? 그지?” 승경이는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엄살은 - 쯧 “3학년 명단 만들어와.” 승경은 대답도 않고 얼굴에 핏기하나 없이 벌벌 떤다. 지금 녀석에게는 내가 호안 마마보다 더 무서운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으라고. 내가 얼마나 잔인한지 똑똑히 알아둬. 다시는 나와 싸울 의욕조차 생기지 않도록 말야. 의욕을 잃은 녀석을 요리하는 건 내 특기니까. 그런 승경을 보면서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헌이 입을 열었다. “무슨 명단?” “사실 내가 너희들 머리통을 손봐준다고 나쁜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길게 뻔한 싸움 박질해서 사람 패는 것도 이제 귀찮고. 그래서 그냥 부탁이나 하나 하려고.” “............. ” 중헌은 대답이 없다. 뭐 별로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중헌의 안주머니를 뒤져서 담배 한 개피를 찾아냈다. “거절해도 상관은 없어.” 불을 붙였다. “사람을 패고 쾌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나는 웃으며 담배 연기를 승경의 얼굴에 뿜었다. 안그래도 파랗게 질린 얼굴이 더 창백해진다.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지. 아무리 말을 안 듣는 아이도 결국 죽을 만큼 맞으면 멍멍 짖으라면 짖고 야옹하고 울라면 울거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 가지고 있다는 3학년 명단 이번주까지 만들어와. 더는 못 기다려. 분명히 알아두라고 멍멍하고 짖고 싶지 않으면.” 승경이 손바닥을 펴서 거기에 담뱃불을 눌러 껐다. 하얀 붕대가 검게 변한다. “재미있네. 다음에는 붕대 안 감긴 손에다가 할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웃으면서 내 사랑 라면이 기다리는 매점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뭔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야 정신차려.’하는 다급한 중헌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별로 놀랄만한 것도 아니지. “이.. 김치냄새 나는 동양인주제에.” 부들부들 떨면서 내게 총을 겨눴다. 아까 자기 팀 보는 앞에서 나한테 맞은 게 그렇게 분했나? “윌 크로포트! 그거 진짜 총이잖아? 못 내려놔?” 지미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다가 왔지만 윌은 총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죽여 버리겠어. 지미 너도 다가오면 죽여 버릴꺼야.” 윌은 옆집에 사는 하얀 돼지로 지미랑 잘 아는 사이였지만 지미가 나랑 놀기 시작한 뒤로는 자기 팀을 따로 만들어서 좀 소원하게 지냈었다. 뭐 김치냄새가 나서 같이 다닐 수 없다나 뭐라나. “그거 너희 아버지 서재에 있던 권총아냐?” 내가 놀란 것처럼 묻자 녀석은 하하하 실신한 것처럼 웃는다. “그래.. 이건 진짜라구.” 손이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떨어서야 누굴 맞추겠어? 지나가는 개도 못 맞추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하얀돼지에게로 걸어갔다. 하얀돼지는 ‘다가오지마’라며 아주 이제는 펑펑 울기까지 했다. “다가오지마. 진짜 쏠꺼야. 너같은 동양인을 죽여도.. ” 마침내 내가 녀석의 코 앞에 섰다. 눈을 꼭 감고 방아쇠를 담기려는 듯 보였지만 바지가 축축해지더니 곧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들었다. 공포! 나는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 녀석을 보고 어떤 희열을 느꼈다. 두려움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해당할 거라는 죽음의 공포. 뚜르륵 - 나는 녀석의 이마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반쯤 당겼다. 이미 녀석은 무릎을 꿇고 눈동자가 반쯤 돌아간 상태였다. “사.. 살려줘..” 목소리가 녀석의 입이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어떤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너한테선 곰팡이 쓴 치즈 냄새가 나. 이 돼지새끼야.” 그리고 폼 나게 방아쇠를 완전히 당겼다. 녀석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하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그냥 방아쇠를 당기자 탁-하는 소리만 났다. 싱겁군. “찰싹-” 지미가 달려와서 내 뺨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든다. “미쳤어? 그러다가 진짜 총알이 들어있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구 그래?!” “알고 있었어.” “뭐?” “총알이 없는 걸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크로포트씨가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어. 서재에 있는 총에는 총알을 장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물어본거야? 서재에서 총을 가지고 왔냐고?” “그래. 이 나이에 살인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내 덤덤한 대답에 지미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넌.. 너무 위험한 녀석이야. 꼭 악마같아. 언젠가 난 너때문에 영혼을 빼앗기겠지.” 그리고 나를 꼭 껴안는다. 두근두근 나보다 더 심하게 뛰는 지미의 심장소리가 정말 요란하다고 생각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0 화병에는 어제의 하얀색 장미대신 노란색 장미가 꽂혀있었다. “이별이라는 꽃말이었지?” 왠지 아름답고 애틋한 느낌이다. 쉭- 쉭- 소리를 내며 가습기가 쉴 새 없이 새하얀 김을 내뿜는다. 뿌옇게 흐린 창문. 왕자님은 여전히 달콤한 잠에 빠져있다. 병원을 나와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양손에 들린 검은색 비닐봉지에는 저녁 찬거리가 가득 들었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하기로 했다. 메뉴는 야채 전골과 간단한 튀김. 아저씨와 둘이 먹기에는 좀 많지만 오랜만에 하는 요리니까. 의외로 일본음식이 잘 맞아서 일본에 살 때 일부러 유명 요리집에서 일년정도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 이것저것 배워둔 것이 이렇게나 쓸모가 있을 줄이야.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데 누군가 날 툭-치고 지나갔다. 분명 고의로. “어어.. 이것 봐라?” 인상이 몹시 좋지 않은 남자둘이 날 불러 세웠다. 순간의 판단이 저녁을 좌우한다. 주위에는 아직 운동이나 조깅을 하는 사람이 꽤 있다. 설마하니 이렇게 사람 많은데서 날 치겠어, 어쩌겠어? 지들이 막가파도 아니고. OK. 조용히 사과하고 끝내자. 머리가 결정을 끝내자마자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돌변 둘에게 사과를 했다. 연기파 한이수. “죄송해요. 짐이 많아서 미쳐보질 못했어요.” 솔직히 난 좀 착하고(?) 얌전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런 시비 걸기에 만만한 상대인가 보다.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더 심했었다. 그럴 때면 뭐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죽지 않을 만큼 패주곤 했지만. 내 성격이 지금 이 모양으로 망가진 데는 그때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우 주관적이지만. 옛날부터 성격이 드러웠다고 박박 우기면 할말이 없다. “못 봤다면 다야? 이 쪼끄만한 게.” 아, 열받네. 저녁만 아니였음 니들은 다 죽었어. 니들 인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저녁 찬거리들이 불쌍해서 봐준다. 문득 건달처럼 보이던 두 남자의 옷이 교복이라는 걸 알았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단추를 마구 풀어헤쳐서 몰랐지만 분명 우리학교 학생이로군. 이름을 알아두면 나중에 응징도 가능하겠군. “죄송해요. 이 짐 때문에 댁들이 안보였다니까요.” 허걱- 엉뚱한 생각하느라고 표정 관리랑 입 관리가 잘못된 모양이다. 이런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미쳐. “댁? 이게 어디서 날 봤다고 댁이래?” 손을 치켜든다. ‘어쩔 수 없이 내 저녁 찬거리들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내려놔야하나’하고 생각하는 찰라 내 2.0 2.0 레이더에 걸린 인물이 있었으니. “한주형!” 나는 매우 절친한 사이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것도 공원 사람들이 전부 들을 정도로 커다랗게. 까만 마소재로 된 남방을 입고 있던 그가 돌아본다. 유난히 흰 얼굴이 눈에 띈다. “한주선배?” 역시 내 느낌이 맞았다. 우리학교 유명인이라더니 이 두 남자 역시 한주를 알고 있었다. “한주선배랑 친하냐?” 한주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이 느리군. “우.리. 한주형을 아세요?” 일부러 우. 리. 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빙긋 웃어보였더니 두 남자는 사색이 되서는 귓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오예, 오늘 저녁 찬거리들이 거리에 나뒹구는 일은 없겠구나. “무슨 일이야?” “아니, 니가 오기도 전에 문제가 해결됐어.” 그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뭐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 있나. 내가 한 거라고는 그 녀석들에게 좀 유명한 이 녀석 이름 석자 팔아먹은 것 밖에는 없는데. “넌 모르겠지만 난 너한테 조금 고맙거든,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녁 먹었냐?” “아직.” “좋아, 우리 집에서 먹어. 재료가 많아서 너 하나정도는 끄떡없거든?” 양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 하나를 그의 손에 냉큼 넘겼다. 역시 밥숫가락 보다 무거운 건 딱 질색이다. 좋은 짐꾼이 하나 생겼군. 풉- 녀석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너 정말 특이하다. 내가 안 무섭니? 다른 애들은 무시당할 것 같다고 아예 나한테는 말도 안 거는데.” 입에 걸린 미소가 자조적이다. “내가 네 주위의 얼간이하고 같아 보이냐? 얼간이들은 못나빠졌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잘났다고 생각하는 널 늘 비교하니까 말을 못 거는거야. 무시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니까 수궁하고 말을 안거는거지.” 나는 한주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좀 빨리 가자고 앞장섰다. 녀석이 뭔가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내가 신경쓰이는 건 아저씨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였다. 오랜만에 큰소리 좀 쳐놨는데 실수하는 건 창피해! 연예인이 아닌 내게도 스토커가 있다. 스토커주제에 얼마나 어설픈지 어디에 숨어서 나를 보고 있는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토시오, 그만 나와.” 걸음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보자 전봇대 뒤에 숨어있던 토시오가 흠칫 놀라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인다. 결국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조심스럽게 내 앞에 섰다. 동그란 눈과 아직은 아이티가 나는 통통한 볼. 볼을 꾹 집어서는 잡아당겼다. “아파요.” 눈가에 금방 눈물이 찔끔 맺혔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왜 따라오고 그래?” 토시오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변성기도 늦어서 그냥 척 보기에는 귀여운 여자아이로 보였다. 사실 왠만한 여자아이보다 더 귀엽다. 앙증맞은 붉은 입술과 오똑한 코. 복숭아 빛 발그란 뺨은 정말 사랑스럽다! 그래서 자주 꼬집어 준다. 하하-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라고 할까?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려 놀았다고 했다. 토시오는 내가 일본에서 다니던 에스컬레이터식 학교의 중등부에 있었다. 그런 토시오가 거칠디 거친 남중에 입학을 했으니 그 애들이 친구로 받아들여 줄 리가 없었다. 처음 토시오를 봤을 때도 온몸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구르고, 뺏기고, 차이고 매일 혼자서 전쟁을 치렀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아직 어린애들이라 다른 요구나 협박이 없었다는 것뿐. 전학을 무려 5번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조차도 신물이 나셨는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6번째는 없다고 검정고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단다. “나.. 이수형이 좋아. 아무래도 나 게인가봐.” 내 옷자락을 잡고 울먹울먹거리던 눈동자가 드디어 폭팔했다.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런 고백과 어른처럼 우는 아이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진정시키는 것 또한 내 몫. “토시오,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얼른 토시오를 한손으로 안고 다른 한손으로 등을 토닥거리며 울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힐끔 힐끔 쳐다봤지만 다행이라면 토시오가 다른 사람 눈에는 완벽하게 여자로 보인다는 것.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1 “들어와.”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바로 부엌으로 갔다. 한주는 얼떨결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영 어색한지 주춤거리며 내가 있는 부엌으로 왔다. “거실에서 TV라도 보지? 아님 게임할래?” 대답대신 식탁의 의자하나를 빼서 거꾸로 걸터앉는다. 구경이라도 할 심상인가? 뭐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다행이 아저씨 오시기 전에 저녁을 다 될 것 같았다. 사실 전골은 재료만 다듬기만 하면 되고 튀김이 손이 좀 가서 그렇지 오래 걸리는 음식은 아니니까. “심심하면 야채라도 좀 썰어라.”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은 철저히 부려먹자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나이기 때문에 별로 심심해보이지도 않는 한주에게 칼과 도마를 내주었다. “잘할지 모르겠는데?” 한주가 어색하게 웃는다. 칼 잡는 폼이 평생 부엌에서 지 손으로 밥 한번 챙겨먹은 적이 없구만. 어머님이 뉘신지 아들한번 귀하게 키우셨소. “파는 이렇게 칼을 비스듬히 해서 크게 썰어. 그리고 버섯은 얇고 길쭉하게” 입으로는 한주에게 주문을 하고 손으로는 전골에 찍어먹을 소스를 만든다. 등 뒤에 앉은 한주가 웃는 것 같았다. 보이지도 않는데 미소가 들린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친구가 와있었구나?”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신다. 한주가 못내 반가우신 모양이다. 아니 사람이 반가우신 거겠지. “네, 괜찮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에 현관에서 신을 벗으시던 아저씨가 완전히 멈춰버렸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버지?” “아.. 그.. 그래 넌 이세였지. 하..하하..” 쑥스러운 듯 웃으시고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렇게 불러드릴걸.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내겐 당신만 꼭 아버지라고 불러야한다는 그런 의리 따위는 없으니까. 저녁은 매우 즐거웠다. 한주는 말은 없었지만 의외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 이야기하는 게 편했고 아저씨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른다. “다음에 또 놀러올께요.” “한주 데려다주고 올게.” “안 데려다 줘도 되는데?” “데려다 주고 싶은데?” 마주보고 쿡쿡 웃었다. 내가 웃옷에서 담배를 꺼내 한주에게 하나 내 입에 하나를 물었다. 내일은 비가 오려는지 달빛도 까만 구름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저녁을 너무 과하게 얻어먹었으니까 내일 점심은 내가 쏘지. 매점으로 와.” 그만 들어가 보라며 한주가 타탁- 뛰어 앞으로 나간다. “나 많이 먹는데 후회하지마라.” 농담아니고 진짜 많이 먹는데. 내일 지갑이 거덜이 나봐야 후회할 것이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너무 멋지다. 얼음골왕자라더니 무슨 온탕왕자구만. “토시오, 나도 네가 좋아.” 눈이 반짝 반짝거린다. 오, 토시오 그런 눈으로 보지마. 눈이 부시잖아. 너랑 오래있으면 내가 무슨 ‘신’이라도 된 착각을 느낀다고. 내 말 한마디에 울다가 웃었다가. “넌 아주 예쁘니까 게이라고 해도 전혀 싫지 않아. 그걸로 네가 행복해진다면 나도 찬성이야. 사람은 행복해지면 아주 강해지거든? 하지만 지금은 머리로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느껴야지 절대 남에게 말으로 전달하려고는 하지마. 넌 아직 너무 어리고 수없이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가지고 있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지금은 누구에게든 보호받고 싶고 또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든 건지도 몰라. 여자라면 보호받는 건 당연하니까. 자기암시 같은 거지. 네 말대로 게이일지도 모르고 또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가능성도 기회도 포기하지마.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어. 가슴에 담아둔다면 너만 툭- 털어버리면 끝이지만. 생각을 번복하는 건 네 나이 때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말으로 전달하는 건 조금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 토시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볼에 뽀뽀를 해줬다. 뺨을 붉히며 굉장히 작은 미소를 짓는다. 사랑스러운 아이다. 처음 만난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였었다. 선생심부름으로 중학교건물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렸다가 토시오를 봤다. 학교 현관에 맨발로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눈물을 떨구는 마치 일본의 도자기 인형같았다. 중학생들은 이미 다 하교했을 시간인데? 가까이 가보니 옷은 먼지투성이로 마구 구겨져있고 얼굴과 팔에도 상처투성이였다. “야, 왜 그러고 서있어?” 말을 걸자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한발 뒤로 물러선다. “시.. 신발을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게 아니라 누가 버렸거나 숨겼겟지. “이름이 뭐냐?” “토시오 하시바미. 일학년이에요.” 나는 토시오의 옷을 털어주고 화장실에서 손수건을 적셔와서 팔과 얼굴을 닦아 줬다. “예쁘네.” 내가 웃자 토시오도 따라 웃는다. “애들은 예뻐서 싫데요. 뭐 여자 같다나요. 우리학교는 남자애들만 다니는 곳이라고 저더러 다시 여학교로 전학가래요.”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하는 토시오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보는 사람은 더 애처롭기만 하지만. “집으로 가볼까?” 나는 토시오에게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힘들잖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맨발로 집에 갈 수는 없잖아?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딨냐?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빨리 업혀, 팔 떨어지겠다. 우산은 네가 들고.” 굵은 빗방울이 장애물이고 내 목표는 토시오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 기합을 넣고 빗속을 냅다 뛰었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2 어제의 뜨거웠던 여름이 거짓말 같다. 창가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눈꺼풀이 감겨온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 몸의 낮잠을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이건 성형수술 정도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민수가 혀를 차며 현철에게 면박을 준다. “신이 공평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이게 어디가 공평하다는 거야? 16살짜리가 키가 180이라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70%로는 다리길이 같다.” 현철이 잡지를 잡고 오열을 하고 있다. 옆에서 민수가 거든다. “다리만 기냐? 얼굴 봐라, 얼굴. 이게 어디 사람얼굴이냐? 너나 나나 그냥 콱 죽는 수밖에는 없다고.” 이제는 서로 ‘동지!’라며 껴안고 운다. 얼씨구,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저 정도면 천생연분이지, 암. “쟤들 왜 저러냐?” 어느 사이 승강이는 제 집 드나들 듯 내 옆자리를 드나들더니 결국에는 내 옆자리로 아주 이사를 해버렸다. “현철이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 이상형이 지금 쟤들이 보고 있는 잡지에 나오는 쪽바리새끼란다. 이름이 토시오 뭐라던가.” 토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철과 민수에게로 갔다. 둘은 여전히 껴안고 같이 죽자느니 다음세상에서는 꼭 저렇게 태어나자느니하며 신세타령을 하고 있다. 애도 아니고. “이 잡지 나도 좀 보자.” “아예 너 가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민수가 내 가슴팍으로 잡지를 던져버린다. “땡큐.” 자리로 돌아와 잡지를 펴들었다. “니가 좋아하는 기집애도 그 쪽바리 좋아한다디? 남자가 할 일이 없어 화장하고 여자 화장품 광고를 찍냐? 재수없어.” 그냥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통이 누구에게나 같을 수 없고 자신의 과거나 생각이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는 없는 일이다. -형, 난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어. 친구라는 게 되보고 싶어. 소원이라는 게 고작 이것이였던 아이다. 승강이는 툭툭거리며 문자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까맣던 머리카락이 금발로 변해서인지 귀엽다기 보다는 섹시하다는 느낌이다. 유니섹스니 뭐니 하더니 중성적인 이미지를 밀기로 한 모양이군. 붉은 입술과 길다란 속눈썹이 여자같지만 상의를 벗고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진청바지만 입은 채라 남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예쁘군, 난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단말야. 토시오의 얼굴이 커다랗게 크로즈업된 페이지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오늘은 편지를 한통 써야겠다. 녀석이 좋아하는 고은 하늘색 편지지에 일기장처럼 내가 어떻게 지내는 지를 고스란히 적어 보내야겠다. 편지가 도착할 때 쯤 전화도 한통 해야겠지? -운명을 믿나요, 토시오군? 물론이요. 운이 좋았는지 전 제가 가장 힘들 때 그 사람을 만났어요. 영혼의 이끌림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죠. 지상의 어떤 악마도 그 사람보다 더 매력적일 수 없죠. -어린 나이에 굉장한걸요.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나요? 글쎄요, 아마도 지금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있지 않을까요? 말하고 보니 제가 더 궁금하네요. 이 기사를 보고 있다면 제발 연락 좀 해요.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당신 이야기를 알고 싶어요. 기다리다가 지치는 건 좋은데 그 사람이 날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사람을 죽인다더니 왠지 슬퍼져요. 토시오 하시바미와의 인터뷰 中 “점심은 너희 끼리 먹어라. 난 선약이 있으시다.” “지금 배신때리는 거냐, 한이세! 혼자서 맛좋은 거 먹다가는 한수저도 못먹고 배탈날거다.” 현철이 격분한다. “배탈이 아니라 식중독에 걸려버려랏!” 민수가 한술 더 뜬다. “한주가 점심사준다고 오래서 가는거야. 정 따라오고 싶음 오던가.” “3학년의 얼음골 왕자 최한주? 미쳤냐, 그 인간이랑 밥먹게. 한술도 못 먹고 체할게 뻔해. 혼자 다녀와라.” “나도 그냥 멀건콩나물국에 맛없는 명태조림이 차라리 속 편하겠다. 잘 다녀와라.” 현철과 민수가 수저로 경례자세를 취하더니 이별을 고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급식을 받으러 가버렸다. 하여간, 웃기는 녀석들. “여기야.” 한주가 먼저 와있었다. “두 바보친구들을 상대하느라 좀 늦었다.” 매점은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세 없이 북적거린다. “뭐 먹을건데?” 식당 상단에 걸린 메뉴판을 보며 한주에게 묻자 보지도 않고 정식이란다. “난 라면 두개 정식 하나.” “누구 더 오기로 했냐?” “아니, 다 내꺼.” 내 체구를 한번 보고 메뉴판을 다시 한번본다. “과식해서 가스활명수 사달라는 소리는 하지마.” “걱정마. 이 몸이 절대 걸리지 않는 병 중에 하나가 과식이니까.” 어서가라고 손짓을 해보이자 미심쩍은 표정으로 음식을 받으러 갔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한주가 가는 곳에는 길이 만들어진다. 슬슬 피하는 건 일학년이고 가볍게 인사라도 하면서 길을 내주는 건 이학년 왠일이냐며 앞으로 밀어주는 사람은 삼학년이다. 재미있네. 후후후후 “너 한이세아니냐?” 그 복잡한 틈새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삼학년 뱃지를 달고 있었다. “퇴원했다더니 내 얼굴은 안보고 싶디? 섭섭하네.” 승경이 녀석만큼이나 느끼한 녀석이로군. 뭐 중헌이 녀석이 명단을 만들어온 후에 움직일 생각이였지만 먼저 안다고 해서 나쁠건 없지. 녀석이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내 일행한테 무슨 볼일이야?” 한주가 나타났다. 식판을 들고. “한주 네가 매점에는 왠일이냐? 그리고 누가 니 일행이라고? 이 걸래가?” 난 더 듣고 싶었는데 한주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식판을 그 새끼 얼굴에다가 박아버린 것이다. “곽현, 함부러 떠들지마. 전교생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너 형준이가 뒤 봐준다고 아주 기새가 등등한데.. ”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곽현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날려버린다. “형준아, 그 새끼 다시는 내 앞에서 깐죽거리는 일 없도록 해라.” “알았어.” 아, 저 사람이 3학년 짱인 형준인가 하는 녀석이군. 주먹은 뭐 꽤 쓸만하네. 현철이와 민수말처럼 형준은 한주가 신경쓰이는 모양인지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라고 걱정말라며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저런 말을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친한 친구일까.. 아니면 그냥 힘의 균형을 위한 것 일까? 짱인 형준이 만약 한주와 정식으로 붙어 만약 진다면 당연지사 짱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이고 이긴다해도 얻는게 별로 없다. 한주는 싸울 맘이 없으므로 형준이 친구인척 한주 뒤를 봐준다면 그런 위험한 내기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린다. 정말 그렇다면 형준이 놈은 머리가 좀 좋은 편이고. “한이세, 너도 오랜만이다. 몸 조리 잘해라.” 어라? 저 녀석도 나를 알네? 이 몸 보기보다 꽤 유명인이시구만. 야비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소름이 돋을 것 같다. 뭐.. 뭐야 저자식.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3 입맛이 뚝 떨어졌다. 잃어버린 입맛을 회복하려면 형준인가 하는 녀석을 찾아서 응큼하게 날 보던 눈을 돌아갈 만큼 패줘야 하는데. 후회막심이다. 내 손에는 이미 마지막 라면그릇이 텅텅 빈 채로 있다. “너 진짜 잘 먹는다.” 무슨 소리야 지금 난 입맛을 잃었다구! 내 입맛 돌려줘. “정식 하나 더 시켜서 나눠 먹을까?” 한주가 입맛없는 나에게 뭘 더 먹으라고 하네? 절대로 넘어갈 리가 없어. “응, 정식말고 라면시켜서 나눠 먹자.”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이런! 배가 머리를 배신하고 말이 막 튀어나온다. 하지만 한주가 시켜준 라면은 거의 내가 다 먹었다. 젠장.. 이 놈의 뱃속은 자존심도 없나? 병실 문을 열자 진한 꽃향기가 숨을 쉬듯 뿜어져 나온다. 커다란 백합바구니가 보였다. 어떤 센스꽝이 병실에 백합바니구를 보내냐? 그것도 저렇게 큰걸. 뭐 색색의 장미꽃들도 병실에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꽃다발이 아니라 바구니가 온 모양이네?” 그냥 흘린 말이였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가 대답을 하셨다. “응, 누군지 몰라도 이세를 많이 걱정하는 사람이겠지. 매일같이 정성이야. 3달이 넘도록 같은 꽃이 오는 일이 없단다.” “뭐?! 그럼 이 꽃들은 누가 보내는지도 모른단 말야?” 우리 순진해 빠진 어머니. 이 꽃이 이세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죄책감에 자신의 죄를 덜기위해서 보내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세요? 하지만 기쁜 듯 꽃바구니의 꽃을 나눠 일부는 화병에 일부는 간호사실에 가져다주는 모습을 보고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세의 주위에 이세의 편이 하나 쯤 있었다고 믿고 싶으신 모양이다. 그 믿음을 깨버릴 만큼 모진 놈이 못된다, 나라는 놈은. 즐거운 토요일 - 내일은 더 즐거운 일요일 - 학교에 다니고 처음으로 맞는 토요일이다. 이번주의 마지막 날! 중헌이와 승강이 숙제를 잘 해왔을까나.. 후후후 발걸음도 가볍게 등교를 했다. 가방을 사뿐히 내려놓고 다 외어버린 시간표를 다시 쓱 훑어본 뒤 흐흐- 역시 오전수업뿐이군. 이래서 토요일이 즐겁지. 첫시간은 발음 무쟈게 후진 영어선생의 시간이였다. 오늘따라 무쟈게 후진 영어선생의 발음도 목소리도 니콜키드먼보다도 더 매력적이다. 중증의 토요일 환자. 셋째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쉬는 시간이 였다. “한이세, 잠깐 보자.” 중헌이과 승경이 찾아왔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군. “저 2학년 개망나니들이 또 시작이군.” 주위가 웅성거린다. 승강이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따라나서는 걸 됐다고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반장이 일어서서는 날 저지한다. “나가지마.” “왜 이래? 귀찮으니까 비켜.” “나가지마, 저 선배들 너 때리는 거 더는 못 보겠다. 그리고.. 너 머리도 많이 다쳤고. 이번에 맞으면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몰라. 사실 멀쩡한 것처럼 다녀도 어디가 아파도 아플 것아냐?” 반애들도 하나둘 일어나더니 앞문으로 모여들었다. 까짓것 45명이서 2명을 못당하겠느냐는 얼굴들이다. 할려면 진작에 했어야지 이제와서.. 이세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조금만 너희들이 조금만 더 일찍 이래줬다면 이세가.. 그렇게까지는 되지는 않았을텐데. 나는 반장을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내 일이야. 이제와서 괜히 친구흉내내지 말라구.” 내 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앞문을 애워싸던 아이들도 하나둘 물러났다. 승강이와 현철, 민수도 표정이 얼었다. “여기,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왔어. 필름은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우선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명단이야.” 녀석들이 보는 앞에서 메모를 훑어봤다. 최성빈, 하정만, 이기하, 손민, 이형준, 김태현, 곽현. 일곱명중 첫 번째로 손봐줄 녀석은 정해졌군. 곽현. 그 걸래라는 말에 의미를 좀 알자. 그리고 그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기름기도 좀 빼줘야지. “고맙다. 이만 가보고 다시는 얼굴 보는 일 없도록 하자.” 승경은 고개를 심하게 끄덕였다. 중헌은 그런 승경을 보고는 한숨을 쉰다. 지독한 트라우마 - 넌 절대 내게 이길 수 없어. “선욱이형? 나 이수.” “왠일이냐?” 졸다가 일어난 목소리다. 안봐도 뻔하다.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고 있을 간판도 없는 탐정사무실. “지금 나 좀 볼 수 있어?” “........ 좋아. 우리집 앞 커피숖으로 와.” “이봐, 이봐 선욱이형. 난 의뢰를 부탁할 손님이라구. 형이 이쪽으로 와야지!” “싫음 말구.” 이래서 파리가 날린다. 안할려면 말아라는 식이니. “알았어, 내가 갈게. 대신 의뢰비는 50% 깎아줘.” “너한테는 신세진 것도 있으니 그러지 뭐.” 대답도 시원하고 인심도 후하셔. 택시를 타고 형이 살고 있는 동네로 갔다. “이 명단에 있는 애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까지의 행선지하고 부모님 이력서 좀 준비해줘. 하나도 빠짐없이.” “..... 전부 고등학생들이네. 그것도 고3.” 내가 알아 낼 수 있었던 건 학교 컴퓨터에 침입해서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오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 정도면 선욱이형에게는 충분하겠지. 명색이 탐정인데. “맞아.” “흠.. 뭘할려는 지 모르겠다만은 오늘 저녁까지 이멜로 보내줄게.”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갈게.” “차값.. 니가 계산하고 가.” 계산서를 나한테 내밀고는 자기는 마시다만 커피를 홀짝인다. 으이구! 나이값을 못해요, 나이값을.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쉬운 쪽이 지는 수 밖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산서를 휙- 낚아채서는 카운터로 갔다. ‘선우형은 도대체 뭘하길래 선욱이형 버릇을 저 모양으로 만든거래? 하여간 문제 많아. 많아도 무지 많아.’ 선우형과 선욱이형은 쌍둥이 형제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지만 죽을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애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 ‘곽현은 방과후에 바로 미술학원으로 가. 미대에 들어갈 모양인가봐. 밤 11시까지 학원에 있다가 학원차 타고 집으로 가는 모양이야. 부모님은 평범한 샐러리맨이고 외동아들이라 거는 기대가 대단해.’ 남의 인생을 망쳐놓고 자기 인생에 얼마나 기대를 거는걸까? 한심한 개자식. 장갑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검정색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반팔 티에 검은 색 남방까지 걸치니 깜깜한데서는 보이지도 않겠는데? “이 늦을 시간에 어딜가니?” 현관문 여는 소리에 아저씨가 나오셨다. “잠시 친구 좀 만나러요,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거 참.. 택시비는 있니?” 아저씨는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보이는대로 집어주셨다. “가까워도 왠만하면 택시타고 다녀. 걸어다니지 말고. 알았니?” “네.” 걱정 말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하고 집을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 곽현이 다닌다는 미술학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촌스런 외곽에 낡은 건물이였지만 학생 수는 제법 되는 모양이다. 느긋하게 학원 주위를 돌아보고 미술학원이 잘 보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곧 11시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4 학원이 조금 웅성거리더니 아이들이 떼 지어 나왔다. 나는 얼른 가게를 나와서 일부러 미술학원의 입구를 지나쳤다. “야, 너 한이세.” 역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까? “.................” 곽현은 자기 친구들더러 먼저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내 손목을 잡아 후미진 골목에 날 던져 넣었다. 쓰레기 투성이구만. “너 한주랑 친해진 모양이더라. 그렇다고 날 무시해? 이 똥걸래가!” 뺨을 후려칠 기센지 손을 들었다. 물론 맞고 있을 내가 아니지. 들고 있던 곽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뒤로 비틀어버렸다. 악- 비명이 새어나온다. 난 녀석의 등뒤에 서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넌 내가 널 왜 따라왔다고 생각해? 학교에서 너한테 맞는게 무서워서? 내 손목을 잡아서 끌고오던 니 힘이 너무 쎄서? 웃기지마, 네 새끼 인생한번 망쳐보려고 따라왔다.” 팔을 더 비틀었다. “하.. 하지마.. 놓으란 말야. 이 개자식아. 어디서 반항이야?! 정말 죽고 싶어?” 팔을 비튼 채로 무릎 뒤를 걷어찼다. 그리고 팔꿈치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무릎을 꿇은 채로 얼굴이 쓰레기 더미에 쳐박힌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 몰라? 지금 내가 그 쥐꼴이거든.”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똥걸래야.” 소리를 지르길래 쓰레기 더미에서 얼굴을 들어올렸다. “흥, 그래도 나이 꽤나 드셨다고 버티네. 그래봤자지만.” 나는 녀석의 코를 쥐고 숨을 쉬기 위해서 입을 벌리자 입 속으로 손에 집히는 쓰레기를 쳐넣었다. 이제 그 잘난 입도 건방지게 놀리기는 글렀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대답 안하면 그때마다 죽을 만큼 후회하게 될꺼다.” 으음- 으으음- “사진 가지고 있지?” 으읍- 입에 쓰레기가 들어갔으니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나는 인정사정없이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픽-하고 나뒹구는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서 귀에 대고 더 크게 물었다. “사진 가지고 있는 새끼가 너 포함해서 일곱맞아?” 역시나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이번에는 배를 걷어찼다. “사진 지금 어디있어? 어디있냐고?!” 주먹으로 입을 때렸다. 코에서 피가 흘러 주먹을 적신다. 어차피 장갑을 꼈으니 상관은 없지만. 사실 이 장갑은 지미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원래는 갈색이였는데 지금은 피때문인지 완전히 검게 변해있다. 누구의 피때문인지 왜 죽을만큼 때렸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답할 때 까지 팬다고 했지? 다음 질문, 그 사진 누구한테 받았어?” 다리를 걷어찼다. 사실 다리는 뼈밖에 없기 때문에 타격이 고통으로 바로 전달된다. 새끼발가락을 구둣발로 내리쳤다. 으으아윽-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이 녀석의 눈물만큼이나 지독한 고통으로 변했다. “그럼 자 다음 질문, 필름 가지고 있는 새끼가 누군지 알아?” 허리를 후려쳤다. 질문은 계속 됐고 마구 자비로 두둘겨 패서 결국 녀석이 정신을 잃었다. 으으- 한참만에 녀석이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살며시 뜬다. 나는 그 동안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녀석이 눈을 뜨자 눈동자를 마주보고는 피식- 웃었다. 끝난줄 알았냐? 라는 표정으로. 녀석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떠는 게 보였다. 담배를 마저 다 태우고 다시 장갑을 꼈다. 녀석의 손가락을 곱게 펴서 새끼손가락을 발로 꾹 눌렀다. “아까 니 발을 밟아 버린 것처럼 이 새끼손가락도 밟아 버릴거야.” 녀석이 입을 뻐끔 뻐끔 거리며 계속 움직이자 피와 함께 쓰레기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 다 말할게.. 제발 그러지마.” 말문이 트이셨구만, 아깝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난 원래 좀 비겁해. 콰직- 새끼손가락을 으깨버렸다. 한번 겁을 먹었을 때 완전히 밟아 버린다는 게 내 수 많은 신조중 하나다. “미안해서 어쩌나,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봐야 내가 들을 수가 있겠어? 자, 첫 번째 질문에 대답을 해.” 이번에는 중지를 밟았다. “가지고 있어, 지금 가방 안에 있어. 일곱명이 가지고 있는 거 맞고. 난 성빈이한테 받았고, 필름은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몰라.” 앞뒤는 맞지 않았지만 뭐 이정도면 양호하지. “지금 사진가지고 있는 애들 강남 나이트에 모여있어. 태현이 녀석 생일이라 모일거라고 나더러 오라고 했었어.” 묻지도 않은 말도 술술 나온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원하는 거 다줄게.” 겨우 이정도 인간이 우리 이세를 죽음까지 몰아 붙인건가? 중지에서 발을 떼고 대신 주먹으로 머리통을 한대 더 때렸다. “내가 갈 때까지 여기 얌전히 자빠져 자고 있어라.” 곽현의 가방을 열었다. 작은 안쪽 주머니에서 사진 다발을 찾아냈다. 주머니에 쑤셔넣고 가방은 녀석의 얼굴 위에 던져줬다. 씁쓸하다. 저런 새끼 손봐준 내가 너무 한심하고 피곤하기 까지 했다. 어차피 그 애들이야 하나씩 족쳐도 되니까 오늘은 아저씨도 걱정하실 테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사진을 보기 전 까지는. 곽현이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가로등에 기대서 주머니 속의 사진을 꺼냈다. -이게 뭐야? 손이 부들 부들 떨렸다. 친구들고 재미삼아 본 어떤 포르노 잡지에서도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우욱- 속이 넘어 올 것 같았다. 오한으로 온 몸이 떨렸다. 하지만 난 끝까지 다 봐야했다. 어떤 사진은 화장을 하고 울음 범벅으로 의자에 앉아 바지를 벗은 채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눈물에 지워진 마스카라가.. 얼굴에 까만 흔적을 남기고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눈물. 삐에로가 이런 표정 이였던가? 이 사진 속에 인물이 우리 이세가 맞기는 한건가? 교복을 입은 채로 학교 책상위에 엎드려서 3P를 하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책상 위에 피가 뚝뚝 점을 이룬 채 떨어져있다. 이세는 그 사진 속에서도 울고 있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세외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었고 간간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도.. 섞여있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은 학교같은 곳이 아니였다. 뒷모습뿐이였지만 가끔 보이는 간판은 모텔, 여관, 여인숙.. 등으로 엉망이다. ‘선배들이 하던 장사 계속하려고 했지.’ 중헌이 말하던 장사라는게.. 우욱- 드디어 넘겨버렸다. 곽현 그 새끼 손가락을 모두 부러뜨려놨어야 하는데.. 이런.. 이런 주먹으로 가로등을 쳤다. 손에서 금새 붉은 핏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곽현이 말했던 나이트로 향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지만.. 그까짓 일은 별 것 아니였다. 이세의 아픔이.. 내 가슴을 후벼판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5 “오랜만이다, 한이세. 요즘 안보이더니 더 이뻐졌다?” 나이트 입구에서 어떤 뚱보녀석이 나를 아는 척한다. “김태현이랑 나머지 애들 여기 있는거 맞냐?” “태현이가 니 친구냐? 어디서 반말 지껄이야?!” 얼굴을 잡아서 목을 비틀어 버렸다. 컥- 하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난다. “나 지금 컨디션이 무지 안좋거든? 너 같은 녀석 잡는데 쓸 힘없으니까 좋은 말할 때 불어.” “뮤즈에.. 콜록콜록.. 전부 모여있어.” ‘뮤즈’는 나이트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오늘은 예약손님만 받습니다.’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통째로 빌린 모양이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담배 한까치를 태웠다. 적어도 10명군. 담배를 끄고 모자를 눌러썼다. 장갑은 주머니에 넣어진 채다. 딸랑 - 문을 열자 가게 입구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울렸다. “오늘은 예약손님만.. ” 문을 열자마자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밀쳐내고 가게중앙에 모여 있는 무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퍽- 제일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녀석을 날렸다. “뭐.. 뭐야 이새끼??!” 어리둥절해하는 다른 새끼가 더 궁금해하지 않도록 한방에 보내줬다. 여기 저기 흩어져서 술을 마시던 애들이 모여든다. “저 새끼 잡아!” 테이블 위로 올라서서 머리가 보이는 새끼들은 다 후려치고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오늘밤에는 확실하게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줬다. 뒤에서 누군가 달려들기에 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컥- 하는 소리와 피가 분수같이 쏟아진다. “미.. 미친새끼.. 너 한이세잖아? 돌았어? 학교애들이 다 보게 사진 뿌려줘?!” 주위에 떨거지들을 다 치우고 그 새끼 얼굴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내입에 걸린 미소가 마치 악마 같다는 느낌이 든다. “너 이름이 뭐냐?” “한이세, 니가 내 이름을 까먹어? 죽어도 못 잊을 줄 알았는데? 그 사진 찍을 때 기집애처럼 엉엉 울면서 내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불렀을 텐데? 안 그래?” 창녀를 보는 남자의 눈이 이럴까? 녀석의 눈은 매우 저속하고 우월감에 차있다. 속이 매스껍군, 개 같은 새끼. 녀석의 가느다란 목을 한손에 쥐고 녀석의 몸을 바닥에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손끝이 짜릿짜릿하다. 알지 못할 미소가 내 입가를 맴돈다. 처음에는 발끝만 살짝 뜨는 느낌이 들더니 이제는 완전히 붕- 떠있다. 녀석이 창백한 얼굴로 사지를 떠는 게 손끝으로 전해진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화장을 짙게 한 여자무리와 남자무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입구에 달린 작은 종이 채 울리기도 전에 모두 멈춰 섰다. 내 손에 들린 녀석은 조금 버둥거리나 싶더니 곧 축 늘어져버렸다. “이름을 물었는데 헛소리는.. 쯧..” 혼자 중얼거렸다. 꺅- 여자들의 비명소리에 카페를 메우던 적막이 깨졌다. 고개만 까딱 돌려서 그 쪽을 쳐다봤다. “이 녀석 이름이 뭐냐? 두 번 안묻는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손놔줘라, 그러다가 태현이 녀석 정말 죽겠다.” 키가 제일 큰 녀석이 침착한 목소리로 손을 놓으라는 몸짓을 했다. 손을 놓자 퉁- 소리를 내며 물먹은 가마니처럼 녀석이 내 발치에 쓰러진다. 오늘 생일이라는 녀석이군. 친구 잘 둔 덕에 제삿날이랑 겹치는 엿 같은 일은 피했구나. “내 얼굴 아는 놈 다 나와라.” 나는 모자를 벗어서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저거 형준이가 데리고 다니던 한이세아냐?” 웅성거리는 게 들린다. “여기서 너 모르는 년, 놈이 어딨냐? 한이세.” “성빈아?” 뒤에서 노란머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최성빈. “한이세 맞네.” 그리고 세놈이 더 나온다. 이제 남은 건 이형준 하나뿐인가? “역시 두 번 안 묻는다. 나머지는 어딨지?” “조금 있으면 형준이도 이 카페로 올꺼다.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한테 그게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 그 사진이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신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에 있던 나무의자를 들어 입구 쪽으로 집어던졌다. 애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단숨에 최성빈에게 뛰었다. 가능하면 목표물만을 노리고 힘을 아끼는 게 수다. 최성빈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무릎으로 얼굴을 쳤다. “너.. ” 커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입과 코에서 쏟아지는 피가 바지를 적신다. “더럽잖아!” 배를 발로 걷어찼다. 마구 걷어찼다. 숨이 헐떡거릴 때까지. 철푸덕- 재수없는 면상이 바닥과 키스를 한다. 이제 이 바닥은 못쓰는거야 - 쿡쿡쿡. 갑자기 왜 이 개그가 생각나는 거야? 나 정말 미친 거 아냐? 방법이 잔인할수록 상대는 겁을 먹는다. 자신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고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저주저하며 한꺼번에 덤비지는 않는다. 녀석이 쓰러지자 다음 상대를 골랐다. 주먹으로 목을 내리치고 머리를 잡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흡사 유도를 하는 것처럼. “일대 일로 싸우면 다들 이것들처럼 된다.” 내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냥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 형, 내가 크면 형에게 내 심장을 나눠줄게. -바보야, 심장은 하나뿐이라서 피처럼 나눠주거나 할 수없어. -그럼, 형 줄게. 다섯 살 우리 착한 이세는 어떤 이야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자신의 목숨을 나를 위해 나눠줄 수 있는 아이였다. 그때 나는 이미 목숨을 반쯤은 나눠 받았다. 살고 싶다는 마음. 살고자 하는 용기. 받은 것을 돌려주기도 전에... 다시는 이세가 나를 위해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이세가 깨어나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이제와서 복수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자기는 이미 웃을 수도 없게 됐는데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게 미안해서 형이 편해지고 싶어서 그랬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무슨 변명도 할 수 없는 게 나다. 주먹에서 흐르는 피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르겠다. 화장실에 있는 쓰레기통에 물을 받아서 다섯 놈 얼굴에 뿌렸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6 “이야기 해, 전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놈은 김태현이였다. 목에 남은 시퍼런 멍자국과 쉴새없이 내뱉는 기침. “뭘.. 뭘 얘기하라는 거야.. 콜록.. 콜록..” 곽현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녀석의 얼굴에 뿌렸다. “콜록.. 콜록..” 기침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얼굴을 걷어 차버렸다. “기침하지마.” 쿨럭 - 코피까지 쏟아낸다. 눈물범벅에 코피까지. 지저분 하구만. 머리채를 잡아서 화장실로 끌고갔다. 변기통에 처박고는 ‘세수하고 와’라고 다시 얼굴을 쑤셔 박아 줬다. “으.. 윽.. ” 기침과 눈물을 참느라고 끄윽- 끄윽- 거린다. 뒤도 안돌아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물고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테이블에 기댔다. 아까 어깨를 뭔가로 얻어맞았는데 잘하면 부러졌을 지도 모르겠다. 화가 나서 쓰러져있는 녀석의 배와 어깨를 마구 찼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마구 쳤다. 테이블의 유리가 쩍- 갈라지면서 내 손에도 상처를 남겼다. 테이블의 유리가 산산히 내 손에 박히고 나서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자학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언제 화장실에서 나왔는지 김태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툭-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물방울 자국을 만든다. “얼굴 닦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던주고 물고 있던 담배를 덜덜 떨고 있는 녀석의 손에 쥐어 줬다. “이세에게 한 일 모두를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녀석은 본능적으로 내가 이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안 것처럼 3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이세를 찍은 건 곽현이였어.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괴롭히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냥 얼굴도 반반하고 집도 잘산다고 그런고.. 뭘 해도 칭찬만 듣는 녀석이 짜증이 나서 몇 대 패고 말려고 그랬어. 그런데 그 녀석 맞으면서도 비명 한번을 안 지르더라고. 다음 날 누구한테 이르지도 않고. 금방이였어. 장난이.. 위험한 게임이 된 건. 이세는 아무리 때리고 괴롭혀도 묵묵히 맞고만 있었어. 그래서 점점 강도가 심해지게 된거야. 그러다가.. 민이 녀석이 야한 비디오를 구해왔다고 해서 자취방에서 봤었어. 학원에 가야한다는 이세 녀석도 끌고 왔었는데.. 형준이가 남자랑도 한다던데 정말이냐고.. 웃으면서 그냥 시험해보면 되지라고 했는데 그게.. 장난이 아닌게 된거야.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어. 살려달라고.. 그런데 그게 더 자극이 되서 그 방에 있던 세명이서 돌아가면서 했는데 그 때 있었던 놈이 이형준, 정민 그리고 나야. 피를 많이 흘리고 실신을 했었어. 정말.. 이번에는 선생이나 부모에게 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진을 찍었어. 이르지 못하게 할려고. 정민이 녀석 형이 사진관을 했기 때문에 사진 인화하는 건 일도 아니였어. 사진을 보여주면서 누구에게든 말하면 사진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뿌려버린 다고 했어. 이판사판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정말 녀석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야. 그러다가 가깝게 지내던 일곱명이서 사진을 나눠 갖게 됐어. 사진으로 협박해서 몸도 팔게하고 그때마다 사진도 찍었어. 기념사진처럼.. 이세가 자주 울게 되자 흥이 나서 더 지독한 일도 시켰어. 학교에서든 공원에서든 원하는 곳에서 뭐든 할 수 있었어. 3P든 4P든, 사이코들한테 몸을 팔라고해도 녀석을 말 할 수 없을 테니까. 어느 사이엔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이세가 무슨 기계처럼 보였어. 아픔도 안 느끼고 심장도 없고 자존심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어. 그렇게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렇게 지독히 아팠을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했어. 이세가 뛰어내리던 날.. 형준이가 이세를 데리고 갔었어.. 뭘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이세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나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이제는 완치된 심장이 아파왔다. 기계라고? 누가 기계라고?! 와장창- 옆에 있던 테이블을 밀쳐버렸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천근처럼 무겁다. 균형을 잃고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지독한 아픔이 머리를 지배한다. 몸에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목이 말라왔다. 혀가 탄다. 여기서 완전히 정신을 잃으면 복수고 뭐고 나도 죽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조금 후에 뭔가 시끄럽다 싶더니 누군가 나를 들쳐 업고 뛰었다. 날 업고 손에 땀이 배어나온다. “야.. 정신 차려.” 입술로 뭔가 넘어왔다. 차가운 물. “제발 눈 좀 떠라.. 제발.” 간신히 실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한주의 얼굴이였다. 그것도 울 것 같은. “괜찮냐? 물 좀 더줘?”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는 생수를 머금더니 내 갈라진 입술을 열고 물을 먹였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욕실이였다. “어제 하루 내내 심하게 열나고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땀을 많이 흘려서 씻길려고 했는데 니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너무 피곤하다. 그것도 죽을 만큼. 그리고 꼭 하루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정성스럽게 붕대가 감겨있고 이마에는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이제는 미지근해진 생수통과 다 식어빠진 죽도. 물을 내키는 대로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한주가 들어왔다. 손에는 깨끗한 물과 수건이 쟁반에 들려있다. “일어났냐?” “왜 날 구해준거지? 네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건 난데?” 구해줬더니 내 봇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쏴 붙였다. 분명 눈빛도 나쁠 것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한주는 여느때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네가 했던 말 기억나? ‘내가 네 주위의 얼간이하고 같아 보이냐?’ 하하-” 한주는 내 흉내를 내며 조금 웃었다. “그때 알았어. 니가 왜 그렇게 특별했는지. 어떤 것에도 변하지 않는 네 눈빛. 절대로 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일이 없어. 강한 사람 앞에서도 약한 사람 앞에서도 한결같지. 부러웠어. 그래서 널 구해주고 싶었어. 네가 말하는 얼간이들에게 죽게 내버려둘 순 없잖아?” 한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에서 새옷을 꺼냈다. “자, 그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 내가 오늘 새벽에 대충 씻기기는 했는데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찝찝할거야.” 정말이네.. 몸에서 땀냄새가 난다. “또 씻겨줄래? 쿡쿡-” “이번에도 저번처럼 그냥 씻기기만 할 줄 아냐? 응큼한 짓을 할지도 몰라. 하하하하-” 나는 새옷을 뺏어서 욕실로 걸어갔다. 나- 아쁜넘-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하교 다시 다니기 [외전] [최 현 랑] ‘뮤즈’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살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게 안이 엉망인건 물론이고 수물 명도 넘는 녀석들이 전부 대자로 뻗어있었다. “뮤즈에 미친놈이 하나 떴다더니 진짜 한 놈 맞아?” 지윤이 혀를 내두른다. 뭐, 굉장하긴 굉장하구만. 뮤즈에 모인 멤버들은 각 학교의 일진들뿐이다. 진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기 있는 녀석들을 깨워야했다. 뻗어있는 놈 중 한명의 멱살을 쥐고 뺨을 때렸다. 어지간해서는 눈도 뜨지 못할 만큼 얻어맞은 모양이다. 지윤이 그 꼴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주전자에 담긴 물을 녀석의 얼굴에 끼얹는다. “야, 이 씹새꺄. 정신 차려.” “읍.. 콜록콜록..” 물이 코로 들어갔는지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콜록.. 콜록.. 물... 물 좀 줘.” 지윤이 주전자를 녀석에게 덥썩 안겨준다. “너 가져.” 뮤즈에 습격이 있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이트와 다른 곳에 모여 있던 애들이 꾸역꾸역 몰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이런 거야? 한 놈 맞아?” 성제고 짱 이형준이 도착했다. 강한 상대에게는 한 없이 빌빌대고 약한 상대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잔인한 녀석이 이형준이다. ‘저 새끼,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저렇게 더티하게 노냐? 성제고도 이제 한물갔다.’ 지윤은 대놓고 형준이 험담을 할 정도였다. 지윤에게 받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녀석이 형준을 노려본다. 이제보니 최강외고 짱인 이민수였다. 뺨때린 거 기억하면 나중에 달려들텐데.. 킥- 나한테는 못 미치지만 녀석은 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주먹이다. 침착한 성격에 탄탄한 기본기가 강점이고 단점이라면 너무 침착해서 상황 판단하다가 한대 얻어맞는 타입이랄까? “그 새끼는 벌써 토꼈냐? 쌍판이나 좀 보여주지.” 지윤이는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민수에게 묻는다. 나도 좀 궁금하기는 하다. 정말 한명이라면 말이다. 오늘 뮤즈에서 애들이 모인 건 성제고 일진인 태현의 생일 이였기 때문이라 형준이의 책임이 무겁다. 민수가 입을 열었다. “그 새끼 니가 깔처럼 데리고 다니던 한이세였어. 니가 시켰냐, 이형준?” 한이세??? 나도 지윤이도 아니 거기 있던 놈들은 전부 눈이 휘둥그래졌다. 민수 이 새끼가 너무 두들겨 맞아서 정신이 나갔나 하는 표정이다. “지금 농담하냐. 이민수, 이 미친 새끼야. 내가 말했지, 니 농담은 너무 썰렁하다고!” 지윤이 참지 못하고 민수 뒤통수를 쎄게 쳤다. 내가 ‘환자다, 환자. 참아라.’ 지윤이를 떼어놓았다. “내가 지금 농담하게 생겼냐?! 야, 이형준 대답해. 이 씹새꺄. 니가 시켰어?!” 형준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내가 미쳤다고 태현이 생일날 널 치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 무슨 원한을 졌다고 니 뒤통수를 쳐?” 불쾌한 표정이다. 하긴, 평소 같았으면 싸움이 붙었어도 옛날에 붙었을거다. 한 학교의 짱으로서 남의 학교 짱 뒤통수를 쳤다는 오해를 듣는 건 아주 불명예스러운일니까. 성제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옳다. 하지만 오늘은 형준이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상황이 워낙 상황인 만큼. “그리고 너만 다친게 아니고 우리 일진 여섯이 다 당했어.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텐데?” 민수가 얼굴을 찡그린다. “하지만 한이세가 맞았어. 자기 입으로 분명히 그랬다고. 자기 얼굴 아는 새끼 다 오라고. 사실 그 새끼 얼굴 모르는 놈도 없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지윤이였다. 쿡쿡 웃기 시작하더니 점점 웃음소리가 커진다. “이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고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한이세 이제보니 제법이네. 하하하하하하-” 마침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이 째려보건 말건 상관도 않는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문을 열고 한주가 나타났다. 연락받고 온 것 같지는 않고 편한 차림에 태현이 생일이라 잠깐 인사나 하려고 들린 모양이였다. 뭐, 어떤 미친새끼가 싸움 붙었다고 한주를 부르겠냐만은. 부른다고 올 녀석도 아니고. “한주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지윤이도 잘지내냐?” “물론, 내가 옆에 있는데 누가 우리 지윤 달링에게 손을 대겠냐? 풉-” 내가 허세를 부리자 한주가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한주와 나, 형준이는 같은 이명중학교 출신이다. 사실 난 한주가 성제고에 간다고 했을 때 당연히 성제고 짱은 한주가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때지어 다니는 건 이젠 질렸다며 뒤로 물러섰다. 3학년들이 말이 많았지만 선대 성제고 짱이 워낙에 대단한 인물이라서 한주를 한번 보더니 ‘두들겨 패도 안될 놈이다. 그냥 포기해’라고 엄포를 놔버렸었다. “가게에서 무슨 전쟁이라도 치뤘냐?”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어보기는 하는데 대답 따위는 관심도 없는 눈치다. 워낙에 무심한 녀석이라. “전쟁? 전쟁맞아. 하하하하- 한이세가 글쎄 혼자서 쳐들어 오셔서 전멸시켰단다.” 한참동안이나 웃고 있던 지윤이 불쑥 나타났다. 지윤이 목에 팔을 감았다. 얌전히 내 가슴 쪽으로 기대온다. “이세가?” 한주는 뭔가 집히는 것이라도 있는 눈치다. 아직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발로 짓이겨 꺼버렸다. “이 새끼 한이세아냐?” 가게를 정리하던 다른 학교 똘마니 하나가 손짓을 한다. 흩어져 있던 눈들이 가게 한 곳으로 집중된다. 한주가 갑자기 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덜컹- 주위의 테이블을 치우더니 무릎을 꿇고 이를 악물고 있던 한이세를 자리에 편하게 눕혔다. 지윤이가 뭔가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찾은 표정으로 그곳을 간다. 물론 나도 따라 갔다. “너 이세랑 친했냐?” 지윤의 질문에 한주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친했으면 예전에 도와줬겠지.” “그게 후회가 된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윤도 나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주가 후회라는 걸 하는 것 자체도 그렇고 왜 하필 이세를 도와주지 못해서 후회가 된다고 하는 걸까? 이세의 상태를 살피던 한주가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이세를 안아들었다. 정말 저 약골새끼가 민수와 다른 녀석들을 깔아 눕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형준이가 한주 앞을 가로 막았다. “최한주, 그 새끼 내려놔라.” “싫다면?” “지금 뭐라고 했어? 싫다고? 최한주 그 새끼가 뭘 어떻게 한 줄이나 알아? 최강외고 민수뿐만 아니고 우리학교 일진 여섯하고 다른 학교 일진들도 전부 병신으로 만들어놨어. 지금 그 새끼 데리고 가서 다른 학교 애들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래? 어설픈 동정심으로 성제고 얼굴에 먹칠하지마라. 진짜 내가 뒤통수 깠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사실 일이 커지면 형준이가 제일 불리한 일이다. 말년에 최강외고와 원수라도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한주를 말려야했다. 한주는 묵묵히 앞으로 나갔고 주위에 형준이 말고도 가게에 모여 있던 최강외고 똘마니와, 그 밖에 녀석들이 한주를 애워쌌다. 한주도 싸움을 걸면 상대 해주겠다는 표정이였지만 사실 애워싼 쪽수가 너무 많다. 친구랍시고 내가 거들려고 해도 사실 내가 나설만한 구실이 없다.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주가 우리학교 일진도 아니고. “야, 한주 보내줘.” 의외였다. 한주랑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럴 때 편들어줄 만큼 친하지는 않다. 사실 지윤이는 아무에게나 친한 척한다. 그리고 지윤이는 남의 일에 참견은 잘해도 이렇게 끼어드는 일은 없다. “형준이 씹새야, 내가 그 새끼 보내주고 싶거든? 비켜라.” “선지윤, 말이 심하잖아? 한주는 그렇다치고 이세라는 새끼는 못 보내.” 형준이 아니라 형준과 친하게 지내는 태광공고 세윤이 앞을 막아섰다. 세윤은 형준과도 친하지만 민수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아마 이빨이 갈리겠지. “왜 띠껍냐? 내가 이 새끼 편들어서? 난 옛날부터 형준이 씹새끼가 하는 건 다 맘에 안 들었어. 형준이 씹새끼 맘에 안 들어서 이세 보내줄란다. 길 터줘라.” “지윤이 너, 나 맘에 안들어하는 알겠는데 이거하고는 별개의 이야기잖아? 이건 우리 성제고 명예가 달린 일이야.” 역시 얍삽한 형준이 지윤의 험한 말투에는 신경쓰지 않게다는 듯이 자기 이야기를 침착하게 한다. “길 터주라고 했어.” 아무리 설명해도 길 터주라는 이야기만 하는 지윤의 태연한 얼굴을 보고 형준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분위기가 한주에서 지윤이에게로 몰린 기분이다. 뭐 그게 지윤이가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지윤아 이건 우리한테는...” “길 터주라잖아?!”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지윤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빨 악 물고 참는 잔머리 대왕 형준이와는 틀리게 단순한 세윤이 나섰다. “야, 넌 빠져. 사실 너희들한테는 아무 피해도 없었잖아?! 피해를 입은 건 민수와 다른 학교 녀석들이라고.” 세윤이 말이 백번 맞지만 무슨 일이든 지윤이 이야기에 섞이면 예외가 된다. 이익도 필요없고 손해나는 장사라도 상관없다. 나는 팔분출이라서 무조건 지윤이 편이다. 내가 지윤이 어깨를 감싸고 한 손으로 세윤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세윤은 갑자기 내 손이 자신의 얼굴에 닿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다. “세윤아, 우리 지윤이 얼굴에 침 튀겠다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라.” 내가 손수건을 지윤의 얼굴을 닦으며 '우리 지윤이 괜찮아?'라고 애교를 부렸지만 지윤이는 쉽게 웃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랑아.....” 내 뒤로 일년 후배인 우진과 정인이 섰다. "지윤이 배고프면 사나워진다. 뭐 좀 먹여라." “지윤형 뭐 먹을래요? 샌드위치, 김밥, 주먹밥 뭐가 좋아?” “시원한 걸로 좀 가지고 와라.” 정인과 지윤이 한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지윤이 벌린 일에 수습을 위해 세윤, 형준과 마주선 건 역시 나다. “내 얼굴 봐서 보내줘라. 그래도 안 되냐?"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진심이다. 좋은 말로 해서 안되면 길을 터줄 생각이 들게 끔 만들어 줄 예정이였다. “세윤아, 그냥 보내.. 주자. 현랑이 얼굴도 있고. 한주랑 안면 까고 지낼 것도 아니고.” 형준이 마지못해 길을 터주자 세윤도 ‘씨발’ 이라며 길을 터준다. 한주는 살짝 눈인사를 하고 이세를 데리고 나갔다. - 너도 뭔가에 홀린 거니? 최한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넌 조금 늦은 것 같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한주가 나가자 모여 있던 놈들이 물밀 듯이 빠져나가고 나와 지윤, 그리고 그 두녀석만 남았다. 지윤이에게로 걸어갔다. 목에 얼굴을 묻는다. “우리 여보 놀이할까, 지윤아?” “현랑자기 피곤하지 우리 집에 갈까? 뽀뽀도 하고 더 좋은 것도 많이 하자.” 콧등에 뽀뽀를 한다. 답례로 이마에 뽀뽀를 해줬다. “아, 우리 앞에서 그 부부놀이 좀 그만해요. 닭살 돋아서 죽겠네.” “저번에 했던 임산부 놀이보다 났다. 그땐 진짜 닭털 때문에 숨 막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구요!” 정인과 우진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그런 걸 들을 나와 지윤이 아니지. “사랑해, 지윤달링.” “사랑해, 현랑허니.”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7 만 이틀을 꼬박 전화한통 없이 가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은 완전히 유괴범의 전화를 기다리는 수준으로 삭막했었다. 아저씨는 면도도 하지 않으시고 어제 회사에도 결근하신 채 거실에 놓인 전화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당장 경찰에 신고라도 해놓자며 난리를 부리시다가 실신하셨다고 한다. 나는 두말도 않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학교로 향했다. 한주는 나를 데려다주고 학교로 간 줄 알았더니 한 시간이 넘게 우리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도 마라.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주 초상집 분위기더라구. 전화한통만 했으면 좋았을 일을. 에휴-” 한주는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자기라도 전화를 한통 해줬어야했다고 자책했다. “니가 무슨 죄야. 그냥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준 죄밖에는 없잖아? 쿡쿡-” 팩에든 0.5리터짜리 우유를 아침대신 원샷하고 힘차게 교실로 향했다. “힘내.” 쑥스러운 목소리. 기분 탓인가 얼굴도 좀 붉어진 듯 하다. “응- 온탕왕자. 하하하하-” 목소리가 그립다고 생각해. 네 눈동자에 내가 비췄으면 좋겠다고 매일 밤 소원을 빌지. 창백해진 얼굴에 키스를 하면 네가 깨어나길. 네 왕자님은 누구니? 네 공주님은 어디에 있지? “토요일날.. 너, 너무 말을 심하게 했어. 처음부터 친구를 아니지만.. 이제부터 친구하기로 했잖아.” 승강은 한대 얻어맞을 각오를 했는지 이빨을 악물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쏘아대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네가 위험한 일을 당하면 그냥 모르는 척 해야 되냐? 도와주고 싶어도 그러면 안돼?” “미안, 승강아. 어제는 내가 너무 감정적 이였어. 난 니 친구가 되고 싶고,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도와줬으면 좋겠어. 솔직히 어제 일은 너무 기뻤어. 우리 반 아이들도 너무 멋졌어. 무슨 드라마 보는 것 같았다니까! 그래서 어색해서 그랬나봐. 미안해.” 승강은 소리를 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일요일날 너네 집에 전화했었는데 네가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온다고 그래서 난 니가 또.. 엉엉- 승경이녀석들한테 맞아서 .. 흑흑.. 그 자식들 죽여버리려고 그랬었단 말야.. 엉엉엉-” 내가 설마 그런 얼간이들한테 맞겠냐? 나는 그날 승강이를 달래느라고 온몸에 진을 다 뺐다. 점심시간에도 밥도 못 먹고 녀석을 달래느라고 오후 수업에는 완전히 엎어져서 골아 떨어졌다. 복수라는 것은 반드시 그에 준하는 것을 빼앗아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충 계획은 잡아 놓은 상태였다. 이세의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빼앗았으니 너희들 인생정도는 받쳐야 너희들이 말하던 게임이 끝이 나겠지? “이세야, 이거 3학년이 전해달라고 하던데?” 5교시 쉬는 시간에 우리 반 꼬마 녀석이 작은 상자하나를 전했다. 3학년? 왠지 찜찜하군. 상자를 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시 엎어졌다. 머리가 또 아파온다. 저 상자 안에는 분명 내 머리를 더 아프게 할 뭔가가 들어있는 모양이다. 예감하나는 옛날부터 아주 좋았으니까. “다음 주부터 1반에서 3반까지를 맡아주실 원어민선생님이 바뀌셨어요. 모두 인사하세요.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조언자가 될 거라고 믿어요. 지미선생님은 미국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지금 게임브릿지의 법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학생이에요. 장래가 아주아주 유망하죠. 어떤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나누고 돌아가고 싶다고 하시네요.” 여느 때와는 틀리게 조신(?)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무지하게 후진 발음의 영어선생 옆에는 190도 넘어 보이는 미국인이 서있다. 물론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엎어져있고 선생의 설명도 듣지 않았다. “Hey, boy." “야, 일어나봐. 야.” 앞에 앉은 주완이 황급히 흔들어 깨운다. “응?”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내 책상을 덮고 있다. “.......................?” 그리고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인물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으니. 내가 사랑하던 깊고 푸른 눈동자와 나까지 웃게 만들던 마법 같던 미소.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은 부드러운 곱슬의 금발 머리카락. 그는 여느 때처럼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괴팍한 중늙은이 웨인마저 극찬하던 그 수업태도는 어디로 가셨나, my isu?" “지.. 지미!” 귀신를 본다고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미의 속삭임과는 틀리게 반 전체가 떠나갈 듯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모르는 척하며 그냥 내 옆을 지나간다. “어머! 한이세, 어디 선생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지?!” 무지하게 발음 후진 영어선생이 핀잔을 주고 나는 교실에서 쫓겨났다. 억울햇!!!!!!!!!!!!!!!!!!!!!!!!!!!!!!!!!!!!! “지미,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넌 지금 싱가포르에 있어야 하잖아?” “선우형이 전화를 했더라구. 네가 무슨 일을 벌리는 것 같으니까 도와주라고.” 지미는 능숙한 솜씨로 자판기에서 종이커피 두 잔을 뽑아서 내게 한잔을 내민다. 매점의 싸구려 종이 커피와는 전혀! never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바로 지미 리델이다. 미국의 석유재벌 리델家의 막내아들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와 권력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란 사람이고 또 그것들을 계승해나갈 위인이셨다. “너랑 마시는 커피는 세상의 어떤 커피보다도 달콤하군.” 이런 느끼한 소리도 곧 잘하는 녀석이다. “시시한 일이야, 넌 상관말고 돌아가.” “시시해? 너랑 관련된 일이 내게 시시한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네 동생 정말 닮았더라. 키스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뭐?! 너 안했지? 했으면 죽어!” 나는 지미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 “켁- 놔, isu. 너는 장난이라고 하지만 난 지금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 그리고 아무리 닮았어도 환자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짐승이 아니라고 난!” 혀를 쑥 내밀고 죽은 시늉을 한다. “그래?” 목을 놔줬다. “이제 묻고 싶은 건 다 물었어?” “어? 응.”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다는 인사도 안해?” 지미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알았어. 무지 반가워.” 뺨에 키스를 한다. 지미도 허리를 숙여 내 뺨에 키스를 했다. “네가 너무 그리웠어. 무심한 녀석.” 내 머리카락에 키스를 퍼붓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몰려왔다. “안그래도.. 네가 도와줄 일이 좀 있긴하지.”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boy?" 손등에 키스를 한다. “내가 아가씨냐?” 지미가 혀를 쑥 내밀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는다. “마이 러버, 당신을 위해서 심장도 바치겠소.” “그 심장 다음번에 쓰겠으니 당분간은 잘 보관하시요.”하고 발로 걷어차버렸다. 풉- 킥킥킥- 거리는 지미의 웃음소리가 등 너머로 들리고 나는 혼자서 매점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8 “이게 그 애들 프로필이야?” 선욱형이 이멜로 보내준 프로필을 프린트해 지미에게 넘겼다. “응.” 지미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쓴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 장씩 한 장씩 다 읽고는 내게 다시 넘겨주고는 안경을 벗는다. “isu, 생각해둔 게 있는 거지? 말해봐.” 너희들이 이세를 가지고 위험한 게임을 했다면 나도 게임을 해보지. 너희들이 제 손목을 제가 긋나 안 긋나하는.. 후후 곽현 - 하나그룹에서 개최하는 미술대전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느라고 바빠. 지금까지 착실히 쌓은 실력으로 국내대학정도는 무난하고. 이번에 대상을 노려서 유학까지도 생각하는 모양이야. 재능도 충분하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해주겠어. 두 손이 멀쩡해도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가르쳐주지.” 내가 웃자 지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표절?” “타카시에게 곽현의 모티브는 벌써 보냈어. 녀석 실력이면 하루, 이틀정도면 충분해. 타카시에게 일본미술대전에 출품시켜달라고 부탁했어. 곽현이 출품하는 하나미술대전보다 발표날짜가 꼭 하루 빠르지.” -3학년에 곽현알지? 그 애가 하나미술대전에서 받은 대상이 세상에 표절이란다. 일본의 천재 고교 화가인 타카시 유하의 그림을 표절했데. 그게 일본미술대전에서도 입상한 작품이라서 지금 하나그룹에서는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됐나봐. -미쳤어. 일본미술대전이면 하나미술대전보다 하루 빠르잖아? 어느 사이 그걸 훔쳐 본거래? -그러게 말이야. 나라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같이 그림 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창피해. 하나그룹에서는 지금 미술협회에 곽현이 여지껏 출품한 작품에 혹시 또 다른 표절작이 있을지 모른다고 재심사를 요청한 상태고 이번에 수시로 입학한 대학에서도 입학을 잠정적으로 보류한 상태래. 일본미술협회 쪽에서는 곽현이 적어도 10년간은 한국은 물론 어느 국제대회에도 참가할 수 없도록 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해 놨단다. -좀 심하네? 상대가 타카시 유하라 그런가? -그렇겠지. 일본미술의 새로운 계보를 쓸 천재화가잖아. 지금 잡지며 신문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란다. 몇일 뒤엔가 이런 이야기도 들렸다. 곽현이 손목을 그었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더라. 책상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곽현의 프로필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넌 좀 시시했어. 벌써 게임오버라니 쯧.. 최성빈- 부잣집 외동아들이야. 그래서 개망나니 짓을 하고 다녀도 주위에서 쉬쉬거리며 감싸는 모양이야. 선대에서 물려준 재산 덕분에 부모님 두 분 다 자산가이고. 재밌는 건 이 녀석이 입양아라는 거야. 뭐 자기도 모르는 눈치더라만은. “이건 네 힘을 빌려볼까?” “좋아. isu.” -사기? 말도 안돼요. 우리는 전 재산을 쏟은 일이라구요! -좋습니다. 투자하신 돈을 모두 돌려드리죠.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최성빈이라고 아드님이 한분 계시죠? -우리 성빈이를 어떻게 알죠? -그 분을 버리고 어디 먼 곳으로 이민이라도 가십시오. 물론 투자하신 돈 이외에도 충분한 보상을 하지요.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뒤를 봐드리겠습니다. 명함을 내밀었다. -정말 그 아이 하나만 버리면 되는 건가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였다. -네, 물론 두 분의 동의가 필요합니다만. ‘yes’라는 대답 한번으로 이민국의 허가는 물론이고 투자하신 돈도 현금으로 지금 모두 돌려드리죠. -이민? -그래, 이곳에서 계속 살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난 싫어. 싫다구, 엄마. -괜찮아, 넌 처음부터 데리고 갈 마음이 없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귀 먹었니? 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럼 난 한국에 남아? 아빠는? -남는 게 아니고 버리고 갈 거야. 네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려진 것처럼. 뭐, 너 같은 개망나니를 아들이라고 키우는 건 나로선 돈도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서 별루였어. 넌 머리도 나쁘잖아? 한달에 600만원씩 들여서 과외를 시켜줘도 널 버린 거지같은 부모를 닮아서인지 어디 제대로 된 대학 한군데 입학 못 하고 말야.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니? 손해였다구. 불량품 같은 널 키워봤자 나중에 내 목만 물어뜯을게 뻔해. 다음에는 좀 더 돈도 적게 들어가고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좋겠어. 어느 입양기관에 의뢰하든 자판기처럼 내 맘에 꼭 드는 아이로 골라 보내주겠지. 만약 아니라면 반품도 가능하구. 너두 처음에는 이쁘고 낯도 별루 안가려서 좋은 아이였는데. 마지막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는 했다만.. 하긴 언제까지 왕자행세를 하고 다닐 수는 없지, 넌 원래 부모도 버린 못 말리는 아이니까. -성빈선배가 자기 엄마를 칼로 찔렀데. -나도 어제 뉴스에서 봤어. 하긴 그 새끼 개망나니 짓 할 때부터 알아봤어. 좀 싸이코틱했잖아? 지 눈에 부모고 뭐고 뵈는 게 없었겠지. -그래도 자기 부모를 찌르다니.. 소름끼쳐. 사형일까? 무기징역? -아직 미성년자니까 좀 가볍겠지. 다행이 죽지는 않았다니까. 최성빈의 프로필도 곧 꺼내졌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마지막이 흥미롭군. 김태현 - 어머니가 가출한 상태야. 여동생을 낳고 바로. 알콜중독자인 아버지가 있는데 도박에 사기, 절도까지 아주 전과가 화려해.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는데 그래서 두 오누이가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큰 모양이야. 둘이서 같이 눈칫밥 먹고 커서 그런지 세살 어린 여동생을 끔직하게 아끼고. “이건 벌써 전문가에게 손써놨으니까 결과만 기다리면 되고.” “전문가??” - 야, 이 씹새들아. 우리 정이를 어디로 데리고 간거야?! -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니 여동생을 담보로 오천정도 빌렸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해야지. 담보는 잘 챙겨가니까 네 아버지한테도 이제 오천 안 갚아도 된다고 전하고. - 이 미친새끼들! 당장 우리 정이 데리고 와! - 너 돈 있냐? 오천 당장 갚을 정도로? 능력이 안 되면 두 손가락 쪽쪽 팔고 구경이나 하라구. 다음에 니 여동생을 보는 게 어느 사창가나 운 좋으면 술집정도는 되겠지? 하하하하- - 제발.. 제발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정아만 돌려줘.. 제발. - 너 얼굴은 좀 반반하게 생겼구나. 내가 아는 가게 중에 너 같은 녀석도 좀 쓸데가 있기는 한데.. 정아대신 널 데리고 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와 인생을 맞바꿨다. 조금 다르다면 정아는 여자고 김태현은 남자라는 것 정도? -혜주누나? 나 이수. 김태현은 좀 어때? 장사는 잘돼? 혜주누나는 트렌스젠더로 그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마담이였다. 깡패들이랑도 잘 알고 그래서 나이트클럽과 바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내가 김태현을 팔아치운 가게는 혜주 누나의 가게 중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곳이였다. 이른바 2차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랄까? -니가 공짜로 준 돈 오천으로 나는 뭐 좋은 장사했지만 김태현인가 하는 녀석 완전히 초짜라서 손님 받을 때 약을 한 움큼씩 집어 먹는다. 약값이 더 들어. 그래도 지 여동생 때문에 도망 갈 생각도 않고 착실하게 하고는 있지. - 그럼 그 빚 다 갚고 그 약값까지 갚을 때까지 가게에서 일시키면 되겠네? - 한이수, 너두 참 독하다 독해. 이 바닥에서 나도 좀 굴렀다면 굴렀는데 너 같은 독종은 처음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원한 질 일 하지마. 아는 사이라도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김태현 어떻게 지내는지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예, 예. 내가 누굴 몰라 볼 깝쇼? 내 동생은 어떤 마음으로 견뎠을지.. “혜주누나? 이제 나한테 김태현 일로 연락하지 않아도 돼.” 손에 들려있던 프로필을 조각냈다. “누나 마음대로해. 뭘 어떻게 하든.”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19 [하정민] 학교에 가려고 현관문을 잠그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우리형 - 이라는 이름이 액정에 뜨자 또 ‘아침밥은 먹고 학교에 가냐’고 잔소리를 해 댈 형이 뻔해서 웃음이 나왔다. “나 아침밥 먹었어. 그 말 하려고 전화했지? 바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형과 나는 하늘 아래 단 둘뿐인 혈육 이였다. 사진으로 밖에는 부모님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워서인지 형은 나를 끔찍하게 대했었다. 불면 날아갈까 떨어뜨리면 깨질까 내가 무슨 기집애도 아니고. 그래서 10살이나 차이나는 우리 형이 작년에 장가를 들자마자 나는 독립을 했다. 눈치도 빠르단 말야, 나란 놈은. 쿡쿡- 형은 내가 장가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데리고 살아야한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나도 죽을힘을 다해서 ‘내가 기집애냐, 시집 갈 때까지 데리고 살게?! 조카가 보고 싶다. 나를 독립시켜 달라!’며 일주일이 넘는 단식투쟁을 했다. 형은 내가 밥을 안 먹으면 숟가락을 들고 학교까지 쫓아다니는 사람이다. 하루 이틀.. 결국 일주일이 됐을 때 형은 훌쩍이면서 손을 들었다. 결국 고2 때 나는 독립에 성공했다. “내가 정곡을 찔러서 지금 대답 못 하는 거야? 형?” 평소 같으면 ‘형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또는 ‘저녁은 형수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 먹자. 집으로 와.’라는 대답이 날아올 만도 한데 수화기 건너편은 조용하다. “형?” 이상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도 그랬고 지금쯤이면 사진관에 나와 있을 시간인데.. 우당탕 - 갑자기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쿨럭쿨럭 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렸고.. “정.. 정민아, 오면 안돼.. 절대로..” “형?!!!” “정..민아.. 절대로 오지마.. 절대로 오지마.. 부탁이야.” 울음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미친 듯이 사진관으로 뛰었다. 사진관은 샷시는 올려놓은 상태로 안에서 문이 잠겨있었다. 형이 이 곳에 있는 건 분명하다. “문 열어!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형?!” “니가 하정민이냐?” 의외로 쉽게 문이 열렸다. 사진관 안은 불을 켜지 않았는지 깜깜하다. “그.. 그래..” “안으로 들어와.” 내가 발을 들여놓자 다시 문을 잠궜다. 사진관 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로 가득했다. 피 냄새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이질감이 드는 냄새. 어둠에 익숙해지자 가게 안에 남자가 이 사람뿐만 아니라 4, 5명 더 있다는 걸 알았다. 형이.. 혹시 사채에 손을 댔나? 아님 어울리지 않게 남의 여자랑 바람이라도 폈나? 침을 꿀꺽 삼켰다. 에라이, 모르겠다.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이왕 죽는 거 형을 위해서 죽지, 뭐. “우리 형은 어딨어?” “불 켜줘라.” 어쩐지 낯익은 두목인 듯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고 사진관에 조명등 하나가 켜졌다. 그리고 눈에 들어 온 참상은.. 벌거벗은 채 쓰러져 있는 형 이였다. “형?!!!!!!!!!!!!!!!!!!!” 허벅지에 흥건한 피와 바닥을 나뒹구는 콘돔과 정액들. 내가 미친 듯이 형에게 뛰어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자 둘이 내 팔을 붙잡고 배를 발로 걷어찼다. 컥- 피가 입으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는 안았다. 아니 잃지 못했다. 내게.. 내게 형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벌써 그렇게 흥분하면 쓰나? 더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목소리가 낯익은 남자는 아주 신이 나는 모양이다.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빨이 갈리고 아무 것도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저 자식 깨워라.” 남자가 명령하자 쓰러져 있던 형에게 누군가 다가간다. 그리고 다리를 벌리더니 처참해서 더 이상은 봐주지도 못할 만큼 찢어진 그곳에 삽입을 시도했다. “이 씹새꺄, 그만해! 그만하란 말야! 흑흑 - 제발 그만해.” 내 오열에 남자는 더욱 재미가 난 듯 웃는다. “쿡쿡- 더 울어, 더 빌어봐, 더 매달려. 더하란 말이다! 니가 원망스럽겠지? 형을 구해주지 못해서 너 자신이 원망스럽겠지?! 힘이 있다면 구해주고 싶겠지, 목숨을 걸고라도 구해주고 싶겠지? 난 그럴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했어! 내가 원망스러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가 없었다. 혹시 잘 못을 한 건 형이 아니고 나인건가? 형이 나대신 그 벌을 받는 건가? “계속해. 비명소리 나올 때 까지.” 잠시 멈춰있던 손이 다시 형에게로 간다. 멱살을 쥐고 뺨을 사정없이 치자 형이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사정없이 삽입한다. 끄으응 - 거리는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뜬 채로 뒤로 넘어갔다. 헉헉거리며 형에게 달려든 녀석이 형의 다리를 들고 몸을 묻는다. 악- 짧은 외마디 비명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정체를 알 수 없던 이질감 드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끝나자 다른 녀석이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조이는 맛이라도 있더니 이젠 완전히 걸래네. 너덜 너덜. 킥킥-” 그리고 다시 헉헉거리며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형.. 형.. ” 형을 부르기는 했지만 그건 불렀다기 보다는 애원 이였다. 그리고 형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슬퍼하는 것 같다. 상처 받은 것 같다. “정민아.. 보지마.. 여기.. 보지마..” 하지만 형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날 더러 자신을 보지 말라고 했다. 나대신 벌을 받고 있는 형을 보지 말라고 했다. 형의 목에서 비명을 삼키려는 듯 기묘한 울부짐이 들린다. 하지만 그럴수록 심한 행위가 계속됐고 형은 목이 쉬어서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 그 비명은 내게만 들리는 모양인지 나만 울고 있었다. “아아악- 그만 둬. 제발.. 제발.. 뭐든지 할게.. 뭐든지 할테니까..” “계속해! 내가 비명소리 나 올 때까지 하라고 했지?!” “신발을 핥으라면 핥을 테니까.. 무릎으로 가랑이사이를 기어나가라고 해도 할테니까.. 뭐든지 할테니까.. 제발.. 제발 .. 용서해줘. 내가 뭐든지 할테니까 아무 잘못 없는 우리 형 좀 놔줘..”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쳐 박고 빌었다. 남자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다. “정말 뭐든지 해? 나 성질이 아주 개 같아서 받은 건 열배 아니 스무배쯤은 돌려줘야 속이 시원한데.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시키는대로 한다니까..” 형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수 는 없었다. 남자가 어둠 속에서 나와 내 앞에 섰다. “한.. 한이세.. 너.. ” “오랜만이야. 아니지,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 “너.. 너..”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한번만 말 할 테니까 잘 들어. 니 형하고 해. 지금 여기서 당장!” “뭐?!” 어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선택의 여지는 더 더욱 없었다. “야, 비명소리 들릴 때까지 하라고 했지. 안되면 애들 더 불러!” 대답은 듣지 않게 다는 듯 이세가.. 아니 이세가 아닌 이세가 뒤로 돌아섰다. 행동으로 보여라. 소리는 듣지 않는다. 등이 말하고 있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등은 이세가 아니라는 걸. 이세처럼 약해서 울고 감추기 위해서 더 많은걸 포기하는 사람이 갖는 등이 아니라는 걸. .. 하지마. 널 아프게 하지마.. 내가 형에게 다가가자 형이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했다. 그것 또한 나에게만 들린다. 내가 무릎걸음으로 형에게 다가가자 형을 안고 있던 녀석이 ‘쳇’ 이라며 비켜났다. 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 정말.. 미안.”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형의 얼굴을 적시자 형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나를 밀어낸다. 너라도 도망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형의 눈을 가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형을 안았다. 천천히 다리를 들어올리고 피와 정액이 흐르는 허벅지에 키스를 했다. 형의 미약한 떨림이 내게 전해진다. “괜찮을 거야.” 눈을 가린 손에 차가운 액체가 젖어든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삽입에 성공했다. 나는 그대로 형을 끌어안고 바닥에 누웠다. 형이 내 등을 끌어안는다. 그러지 않으면 마치 내가 사라질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세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불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가자, 볼일은 끝났으니까. 넌 평생 그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라. 나도 그럴테니까.” 이세가 나가자 다른 이들도 쫓아나갔지만 이제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 평생.. 이 기억을 끌어안고 산다고? 너는 그러겠다고? 세상에 내가 이세에게 무슨 짓을 한걸까.. 누군가에게 평생 추억이 되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는 걸 난 왜 그 약한 이세에게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까. 바닥을 적시는 눈물과 형의 팔과 이세의 등이 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 형.. 내가 받을 벌을 대신 받게 만들어버렸어. 그런데도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하는 거야? 곁에 있어도 된다고 하는 거야?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0 “9월이 반도 더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덥냐?” 지미에게 투덜거리며 편의점을 향해서 걸었다. “습기가 많아서 그럴 거야.”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핀잔을 주고는 편의점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식힌다. 살 것 같네. “한이세.” 음료수 코너에서 시원한 생수병을 뺨에 부비며 좋아하고 있는데 뒤에서 한주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왠일이냐?” 하긴 여긴 우리 집 근처가 아니라 이세가 입원한 병원 근처다. 12시도 넘은 늦은 밤 이였고. “병원에 누가 입원해 있어서. 그러는 넌?” “그냥..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한주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여자 향수? “흠- 여자친구 집이 이 근처인가 보지?” 장난스럽게 묻자 한주는 손까지 저어가며 난색을 표한다. “여자친구 없어.” “거짓말 하지 마,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만. 취향이 고상하네, 꽃향기라니. 어디꺼지?” 내가 코를 들이밀며 한주 가까이 가자 얼굴이 붉어진다. 몸을 뒤로 빼며 저리 가라는 손짓이다. “아니라니까.” “하하하하- 자식 알고 보니 왕내숭이네. 온탕왕자.” 한주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손이 둘러지더니 지미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누구야하는 표정이다. “인사해, 지미. 이쪽은 우리학교 3학년 최한주. 날 도와준 적이 있어. 여러번.” 지미는 ‘오, 그래?‘라며 손을 내밀었다. 푸른색 눈동자에 애교가 넘친다. 여자라면 누구나 호감이 갈만한 얼굴이고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 되는 녀석이다. “지미 리델이라고 해. 그냥 지미씨나 지미선생님이나 지미형님이나 뭐 그렇게 불러. 지금 직업은 성제고 원어민교사. 학교에서 내가 곤란한 일에 빠져있으면 좀 도와줘.” 얼씨구, 세상 어떤 놈이 널 곤란하게 만들겠냐? 응? 하지만 지미의 얼굴은 더 없이 진지하다. “아.. 네.”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지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다. 이럴 때 보면 얼음 같다는 말이 좀 어울리기도 하네. 지미는 멋쩍은 표정이다. 자기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리라. 석유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들에게서 늘 선망의 눈빛을 받고 자랐으니.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라구, 널 모르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어. 쿡쿡- 한주는 그만 가봐야겠다며 편의점을 나섰고 지미와 나도 곧 편의점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꼭 애인을 빼앗긴 남자 얼굴 이였어. 한주라는 녀석.” 지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쿡쿡-거리며 내 목에 얼굴을 묻는다. “애인? 나 말하는 거야? 미쳤냐.”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과장되게 엄살을 피우며 머리통이 부셔지겠다느니, 니가 장난으로 던지 돌에 개구리 맞아죽는 다는 소리를 못 들었냐느니 아주 난리다. 오늘은 아저씨와 내가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아저씨, 간식거리랑 음료수 사왔어요. 잡지도.” “고맙다. 넌 이만 들어가 봐라. 내일 학교도 가야하잖니?” “아저씨도 출근하셔야하는데 계시잖아요. 나도 오늘은 형 노릇 좀 해볼래요. 그리고 내일은 일찍 가볼 때가 있거든요. 여기서 날 새죠, 뭐.” 아저씨는 선하게 웃으신다. 아버지가 이렇게 웃어주셨다면 난 좀더 착한 아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들국화네?” 한지로 곱게 포장된 들국화가 테이블에 놓여 있다. “늘 이 시간에 가져다 놓는 모양이야. 아까 간호사가 전해주더라.” 나답지 않게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향기가 은은하다. 어째 낯이 익기도 하고. “꽃 별루 안 좋아하잖아?” “그냥.” 꽃다발을 내려놓고 이세의 얼굴을 내려다 봤다. 기분 탓인지 조금 핏기가 도는 것도 같다. 이세의 손을 꼭 쥐고 침대에 기대 잠이 들었다. 지미와 아저씨가 누워서 자라고 난리를 피웠지만 오늘은 그냥 이러고 싶었다. 내일은 하정민의 형에게 갈 거야. 내게서 널 뺏은 것처럼 그 녀석에게서도 형을 뺏어주겠어. 아니 버리게 만들어주겠어. -필름은 하정민이 가지고 있어. 정민이가 인화도 다 했었고.. 쿨럭쿨럭.. 어제 이기하와 손민 두 녀석을 손봐줄 때 나온 말이다. 이제 하정민과 이형준 둘만 남았다. 게임이 슬슬 끝나가려고 하는데 이제 이세만 일어나면 되는데 마왕에게 끌려간 공주님는 기사가 마왕을 무찔렀음에도 아직 그 마왕의 성에 갇혀있다. 왕자님를 기다리니? 기사로는 그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거니? 사진관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다. 모두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지미는 그냥 내가 하는 걸 보고만 있다. “이것들 다 태워버려.” “좋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오늘 일도 따라온다는 걸 거절하자 두 번 청하지는 않았었다. “안아줘도 될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천천히 끌어안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크고 편하다.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줬다면 어땠을까? 그 녀석의 형처럼 이세의 등을 붙잡아줄 수 있었을까?” 지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 이였다. 버림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세를 구해주지 못할 것 같아. 그냥 내 분풀이를 하는 것 같아. 나 자신에게 화가 났는데..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분풀이를 하는 것 같아.” 눈물은 나지 않지만 가슴이 마르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아프다. “너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어. 주어지지도 않은 기회에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너무 자책하지마.” 이마에 베이비 키스를 퍼붓는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는 이세가 깨기 전에 내 분풀이를 끝내는 것이다. 완전하게. “가야지. 가서 끝을 봐야지.” 이제 게임을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마지막 말은 어디로 가게 될까? 운 좋게 체스판에 남을 까 아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까? 이형준 넌 좀 튼튼했으면 좋겠어. 바닥에 떨어져도 살아나서 날 즐겁게 해줘. 부탁이야 - 학교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1 형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웃겠지만 난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어. 꼭 힘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죽고 싶을 만큼 굴욕적인 일이였지만 난 최선을 다해서 참았어. 1년만 참으면.. 내 인생의 1년만 버리면 날 17년 동안이나 사랑해준 사람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속에는 형도 있다는 거 알지? 그런데.. 그런데 말야 17년 동안이나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을 위해서 잘 참던 일이 고작 반년을 내가 사랑한 사람에 의해 깨져버린 건 나로서도 정말 유감 이였어. 죽는구나 하는 순간에 조차 난 형이나 부모님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했거든. 내게 그런 말을 한 걸 지금쯤은 후회하고 있을까? 평생 기억나도록 해주겠어. 끔찍한 몰골로 죽어주자. 난 그 사람의 눈동자에 상처받아서 그런 잔인한 생각만 했어. 내가 그 사람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악마로 만들어 버렸지. 이제 나는 지옥에 조차 가지 못 할 거야. 어떤 곳에도 가지 못해. 죽어도.. 죽어도 그 사람 곁에 있을 거야.. [이 세]의 독백 中 햇빛이 따사롭다. “이. 형. 준 ?” 등교하고 있던 이형준의 얼굴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꺅 - 주위에 있던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선다. 녀석의 친구들로 보이는 몇 몇이 나를 말렸지만 나사가 하나 쯤 빠진 내게는 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신을 잃은 이형준의 멱살을 끌고 성큼 성큼 사라졌다. 멍하니 쳐다보는 것 밖에는 못하는 바보들. 도착한 곳은 지미가 빌린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이였다. 20층이 넘는 고층 건물으로 지미는 제일 꼭대기 층에 산다. 한참 후에야 녀석은 끙-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고작 한방 맞고 그렇게 나가떨어져서야.. 나, 참 한심해서.” 발로 어깨를 눌렀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던 녀석이 다시 땅바닥을 긴다. “너 같은 거랑 싸웠다고 어디 자랑도 못하겠다.” 가슴을 걷어찼다. 감정을 실어서 있는 힘껏 찼기 때문에 아마 뭐가 부러져도 부러졌을 것이다. 헉헉 -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소중한 것도 없고, 꼭 해야 할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없고 넌 19년 동안이나 이 곳에서 살면서 도대체 뭘 한거냐? 밥이나 축내면서 돼지만도 못할 새끼.” 멱살을 잡아서 내 얼굴을 보게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소중하지도, 지키고 싶지도 않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 하나를 알려주지. 그걸로 겨우 돼지랑 같은 수준이 돼주려나?” 녀석의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 천천히 - “부.. 부러지겠어..” “응, 부러지라고 그러는 거야.” 우두둑 -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오, 정말 부러졌군! 너무 재미있다, 그지?” 내가 빙긋 웃자 녀석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응시한다. “대답해.” 반대편 팔을 잡았다. “으.. 응, 재미있어.. 재미있다구..” 팔을 놔줬다. 대신 발로 가슴을 한대 더 찼다. 가슴을 쥐고 구른다. “한번에 대답해, 어떤 경우라도 두 번 묻게 하지 마.” 정강이를 찼다.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싼다. 그래, 사람은 살고 싶어 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 왜 맞았는지 알겠냐?” “으.. 응.. 알겠어.. 알아.” 울상이 되서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알기는 뭘 알아, 이 돌대가리야. “좋아.” 다시 마구 두들겨 팼다. 녀석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녀석 엄살이 지미녀석 만큼이나 심하군.’이라고 생각했다. “너 왜 맞았는지 알아?” “몰라.. 모르겠어.” 주먹으로 입을 때렸다. 우둑- 하는 소리와 피가 투두둑 떨어진다. “이제 알겠어?” 내가 웃으며 주먹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으.. 응.. 응..” “그래야지.”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하나를 옆으로 꺾었다. 뚜- 두둑- 소리가 들린다. “이 손가락도 니 팔처럼 되겠다. 헐렁헐렁.” “그.. 그만해..” “싫은데? 힘으로 한번 날 말려보시지?” 뺨을 찰싹 찰싹 때리며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시지 하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순간 녀석이 내 머리를 향해 헤딩을 했다. 오, 이런- 피가 흘러내린다. “혹시 내가 너한테 당하면서 이렇게 반항한적 있냐?” “어.. 없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데도 아무렇지 않게 묻자 녀석이 질려서는 얼른 대답한다. 쓱- 소매로 눈가로 흐르는 피를 닦았다. “그래? 그럼 죽어 이 자식아.” 녀석의 머리를 잡고 벽에 냅다 쳐 박았다. 쿵- 쿵- 쿵- 뻗어버릴 때 까지 박았다. 그래도 속이 안 풀려서 얼굴을 마구 발로 찼다. 얼굴에 있는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넘친다. “신발 산지 얼마 안됐는데 구겨졌잖아?” 다시 열이 채인다. 녀석의 발가락을 구둣발로 잘근잘근 으깨줬다. 가루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밟았다. “정신 차려.” 녀석을 욕실에 쳐 넣고 차가운 물을 틀었다. 일분이 아깝다. 이런 녀석이 정신 차릴 때 까지 기다려주는 건. 물이 가득 차서 녀석의 코로 물이 넘어가자 켁켁- 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얼른 니 힘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익사체로 발견될 지도 몰라?” 녀석은 팔꿈치로 기어서 욕조를 빠져나왔다. 겨우 빠져나온 녀석을 들어올려서 욕조에 빠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눌러버렸다. 덩치도 큰 녀석이 버둥버둥거리는 게 꽤나 흥미롭다. 얼마나 버틸까? 녀석은 크윽-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치우고 욕조를 기어 나왔다. 웃음이 나온다. 하하하하하하하- “사람이 죽을힘을 다하면 못할 게 없군. 안 그래?” 아까 밟아뒀던 발가락들을 하나하나 다시 밟아줬다. 으으으윽 - 눈물 섞인 신음이 들린다. “너말야, 다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몰라. 사료값이 좀 들어도 널 사람처럼 만들어줄까 생각중이거든. 난 좀 바쁘니까 그 계통으로 아주 유능한 사람을 고용해주지. 아, 너희 부모님이 널 찾을 거라는 희망은 빨리 버리는 편이 나을 거야. 널 조금 비싼 돈 주고 샀거든. 너희 부모님한테.” “웃기는 소리하지 마, 니가 지금 아주 기고만장한데 곧 경찰이 올꺼다. 벌건 대낮에 날 납치했으니 내 친구녀석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냐?! 난 3대독자 외동아들이라구! 알아?!” 악을 쓴다. “알고 있어. 너희 집안에 손이 워낙 귀해서 결혼 한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너희 엄마가 밖에서 만들어 온 자식이라는 걸. 그런데 안타깝게도 니 아버지가 밖에서 여자하나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임신 중이거든. 아들이란다. 이름도 벌써 지어놨다지? 넌 이제 닭쫓던 개꼴이라고.”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 미쳤어? 아주 돌았구만. 소설을 써라.” 나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녀석에게 던졌다. 그 흑백 사진 속에는 이형준의 엄마와 왠 남자가 서 있었다. 행복한 듯 웃는 여자와.. 이형준을 빼닮은 남자.. “네 녀석의 친부지.” 멍하니 있는 녀석의 입을 벌려서 앞니 하나를 잡았다. “이빨이 고르네? 보기보다 관리를 열심히했나봐. 하지만 이 것도 내꺼지. 내가 샀으니까. 난 맘에 안들어, 니가 날 깨물 수도 있잖아?” 욕실 바닥이 피바다가 됐다. 녀석은 동공이 풀려버렸다. 하얀 이빨이 내 엄지와 검지에 들려있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은 손톱을 뽑아볼까?”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서 끌고 거실로 나왔다. “아차, 질문이 하나있는데 기절하기 전에 물어야겠지? 손톱을 모두 뽑은 후에는 분명히 굉장히 아플테고 넌 기절해버릴테니까. 너.. 이세랑 마지막에 만났을 때 뭘 시킨거지? 응?” 손톱깍기가 점점 살을 찝어 들어간다.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2 [이 형 준] 이세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린 날을 생싱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교실에서 하는 게 처음도 아니고 그날은 다른 참관자도 없었으며 내 입장에서 보자면 좀 가벼운 놀이였다. “좀 잘해봐. 그래가지고 언제 가겠냐?” 녀석의 머리를 누르며 펠라를 한참 받고 있었다. 콜록콜록- 사레에 걸렸는지 한참을 기침을 해대는 녀석에게 ‘삼키라’고 했다. 눈을 감고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내 껄 삼키는 녀석의 표정은 정말 최고였다. “다시 해. 한번 더 하고 뒤로 하자.” 머리카락을 잡아서 다시 다리 사이로 쳐 넣었다. 조용한 교실에 쩝- 쩝- 거리는 서툰 소리가 울리면 묘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신성한 교실에서 나는 이런 짓도 했는데 나중에 자랑거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바보 같은 선생들을 조롱하는 우월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뭔가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설마 이곳으로 오겠어하는 생각에 들킬까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세를 책상에 눕히고 바지를 벗겼다. “이야, 스릴만점이네?” 녀석은 사내자식답지 않게 살이 희고 눈동자가 까매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잘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사.. 사람이 오잖아요.. 그만해요..”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그럼 더욱 피가 끓는다. 녀석은 울 때가 제일 예쁘니까. 쿡쿡- 웃으면서 나도 바지 지퍼를 내렸다. “너도 빨리 끝내고 싶지? 그럼 얌전히 있어.” 다리를 들어올렸다. 어깨에 걸치고 막 시작하려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씨발 - ” 욕이 절로 나온다. 이세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은 이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얼굴표정하나 안 바꾸고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한.. 한주야..” “왜 불러?” 나가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너 오늘 시간 있냐?” “그건 왜?” “오늘 저 새끼 빌려줄게. 뭐든 시키는 대로 하니까 하루상대로는 제법 괜찮아.” 한주는 입의 한쪽 끝만 올리고 웃는다. 비웃는 거다. “빨아서 수건으로 만들어오면 생각해보지. 난 걸레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다.” 그리고 탁- 소리 나게 내 손을 치워내고 교실을 나선다. 뒤를 돌아보니 옷을 다 챙겨 입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있는 이세가 있었다. “괜찮아, 저 새끼 입 하나는 무지 무겁거든. 그리고 뭐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번에 성빈이가 ‘뮤즈’에서 다른 학교 녀석들한테 너 돌렸을 때도 저 새끼 구경하고 있었는데, 뭐. 하던 거나 계속하자.. 야?” 이세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야, 한이세?! 너 미쳤어.” 이세는 한주에게로 가고 있었다. “최한주 잘 봐! 걸레가 어떻게 수건이 되는지!” 큰소리를 치고는 한주를 지나 옥상이 통하는 계단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뛰어내렸다. “한주가.. 한주가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안말렸다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세가 손톱깍기를 집어던져버렸다. 손톱이 반쯤은 사라지고 난후다. “으아악 - 죽여버리겠어! 한주 이새끼를 당장.” 이세는 비명을 지르며 나같은 건 이제 눈에도 안찬다는 표정으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띠리리리 - 띠리리리 - “여보세요. 어머니 나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드릴... 뭐? 이세가 깨어났다고?” 이세 아니 이제 이세가 아니라는 게 확실한 사람이 급하게 뛰쳐나갔다. 너무 피곤해서 손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고 거실에 쓰러졌다. 눈만 멍하니 뜬 채로 내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져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엄마 얼굴과 어버지 얼굴이 떠오르고 뭐, 친구들 얼굴도 하나씩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이세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세가 만약에 처음부터 저항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녀석이 여자였다면 나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고백을 하고.. 정식으로 데이트도 하고.. 키스도 하고 싶었다. 아주 많이 떨렸겠지.. 녀석을 처음 안았을 때처럼.. 손만 잡아도 가슴이 설레고.. 그래 네가 내게 키스를 해준다면 난 심장이 터져서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니 발에 엎드려서 발등에 키스라도 하고 싶어졌겠지. 하지만 넌 절대로 그러지 못하지. 내가 네게 고백하지 못한 것처럼 너는 내가 다른 녀석과 다름없이 보였겠지. 그래서 이세를 짓밟으면서도 키스만큼은 하지 않았다. 내 순정에 대한 아주 작은 스스로의 위로로 여겼다. 이세가 내게 키스를 해준다면 아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이 구렁텅이를 벗어났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 세상에 나 올 일은 없겠지. “와 -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냐.” 신호등에 서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미랑여고와 미팅이 있어서 있는 멋없는 멋 다 부리고 나왔는데, 씨발.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비가 올 거라는 걸 나만 몰랐는지 사람들은 전부 우산을 펼쳐들기 시작했다. 회색 도시가 젖어들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멎었다. 고개를 들자 노란색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저.. 괜찮으시면 같이 써요.”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천사같이 웃는 소녀에게 시선과 숨소리와 심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신호등이 바뀌고 나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디까지 가세요? 가능하면 씌워드리고 싶은데.” “예.. 예? 아.. ” 분명 내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붉겠지? 여자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쪽팔려 - “전, 요 앞 편의점까지 가는데.” 경쾌한 발걸음과 명랑한 목소리. 쏟아지는 비가 이렇게 고맙기는 처음 이였다. “이 우산 가지고 가세요. 전 하나 사서 쓰죠, 뭐. 데이트하러 가시는 길이죠? 후후 - 옷 입은 거 보고 바로 필이 왔다니까요. 그럼 -” 편의점으로 뛰어가려는 소녀의 팔을 잡았다. 부러질 것처럼 약하다. 황급히 손을 뗐다. 으악- 치한이나 변태로 착각하면 어쩌지.. 미치겠네. “어느 학교에 다녀요?” 이름도 아니고 학교를 묻다니 내가 미쳤나봐. “성제중에 다녀요.” 아, 성제여중에 다니는 모양이군. 집요하게 물으면 분명 싫어할테니까.. 우연을 가장해서 다시 만나자. 분명.. 분명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때 소녀를 보내준 일이 나에게는 이년동안이나 가슴치고 후회할 일이 되었다. 성제여중에 다니는 기집애들한테 묻고 수소문하고 학교 앞에서 몇일이고 기다렸지만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내 첫사랑이 그렇게 어의없이 끝나는 구나 싶었다. 그리고 완전히 포기하고 있을 때 다시 소녀를 만났다. 여전히 천사 같은 미소와 명랑한 목소리로.. 우리학교에 나타났다. “신입생 대표로 한이세군의 .................”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3 “헉- 헉-” 병원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숨이 턱까지 차서 병실입구에 도착했다. 두근두근- 아파서가 아니라 기대에 부풀어 심장이 뛰기는 처음이다. 제발 - 신이시여, 제발 - 서서히 문고리가 돌아가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이세야.”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나를 보고 힘겹게 웃는다. “형.. ”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무릎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아버렸다. 어머니도 연신 눈물을 찍어내시며 ‘이제 괜찮단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라고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 아니. 형이 너무 미안해.” 이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대고 손을 잡았다. 체온이 전해진다. 심장소리도 들려온다. 감동이라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받는 것인 모양이다. 이세의 목소리는 나를 감동시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너무 기뻐서. 한참을 소리도 없이 운 것 같다. “엄마, 나 배고파.” 이세가 배가 등짝에 붙겠다느니 하며 엄살이다. “응, 응. 엄마가 간호사누나한테 물어서 뭐든 만들어올게.”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가셨다. 하얗고 네모난 병실엔 이세와 나 둘뿐이다. “아빠는?” “아저씨는 출장중이셨는데 지금 연락받고 날아오는 중이셔.” “응.. ” 멍하니 창밖을 본다. 눈이 너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어서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와락 끌어안았다. “형..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응, 말해봐.” “사람하나를 데리고 와줘. 우리학교 3학년이고 이름은..... 최한주.” “최.. 한주?”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남자야.” 이세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H. J - 잊고 있었던 책상 위의 흔적. “형이 경멸해도 어쩔 수가 없어. 데리고 와줘. 제발 부탁이야.” 이세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알아버렸다는 수침심때문이 아니였다. 한주였기 때문이야. 봐버린 사람이 한주였고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거다. “형, 안될까? 응?”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이세의 목소리는 떨리고 아프고 슬프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지 않겠다면 목에 줄이라도 매서 끌고 올테니까.. 형 믿지?”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형.” 지미에게 연락해서 병실을 좀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학교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드르륵 - 3학년 교실 문을 열었다.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이세야?” 한주가 알아보고 내게로 온다. 단순히 죄책감으로 내게 잘해준 걸까? 내게 쉽사리 미소를 보여줬던 건 그래서였을까. “한이세?” 어느 순간 한주는 바로 내 앞에 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굴이라도 한대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세에게 데리고 갈 때까지만 참자. “왜.. 그랬지?” “뭐?” “왜 그랬냐고?! 이세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냥 보고만 있었지?” 한주는 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비어있는 5층의 음악실 이였다. 사납게 손을 뺐다. 순순히 손을 놔준다. “개자식! 넌 형준이나 정민이랑 똑같아. 그렇게 지독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같은 사람으로서 모른척할 수가 있지?!” 한주는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그냥 듣기만 했다. 멱살을 잡았다. “넌 형준이에게 미치는 네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그냥 무시했어. 네 말 한 마디에 우리 이세가..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었는데.. 우리 이세에게 넌 마지막 희망 같은 것 이였을 텐데.. 넌.. 넌 모른 척해버렸어.. 개자식.” “귀찮았으니까.” “뭐?” “이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 그게 귀찮았어.” “설마..... 설마 이세가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내 목소리가 떨린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래, 그 감정 접으라고 일부러 지독한 말을 한거야. 정머리가 뚝뚝 덜어질만한 말만 골라서. 난 누군가 내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으니까. 그 감정 깨끗이 접으라고 이세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모양새를 알려 준거야. 형준이에게 깔려있는 약해빠진 녀석 따위가 내게 그런 감정을 갖는다는 게 우습다고” 짝 - 뺨을 때렸다. 입가에 피가 흐른다. 하지만 반격은 없다. “그럼.. 그럼 왜 그때 날 도와줬지?! 곽현이 날더러 걸래라고 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날 도운거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넌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세가 당했던 지독한 일을 잘도 모르는 척 하던 냉혈한 최한주가.. 네가 그런 말을 듣는 건 참을 수 없었으니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주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세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처음부터..” “내가 날 모른다고 말했던 순간부터. 얼굴이 너무 닮아서 보자마자 알아채지는 못했어. 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너를 특별하게 취급했던 건 아냐.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 정도의 죄책감 따위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질 않았으니까.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같은데.. 이세가 받았을 상처는 내게 하나도 전해지질 않았는데 네가 혹시 받을지도 모르는 상처에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우습지?” 한주는 너무 우습다는 표정으로 큭큭- 거리기 시작했다. “천하의 최한주가.. 이런 우스운 사랑을 할 줄이야.. 큭큭.. 큭..” 울고 있는 것 같다. 분명 울고 있는 거겠지.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4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어. 미안하다.” 몸이 부들거렸지만 살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해 내야해. “이세가 널 보고 싶어 해. 가고 싶지 않아도 끌고서라도 데리고 간다.” 한주는 나를 한번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처음 한주를 만났을 때 느꼈던 청량함이 다시 불오는 것 같다. 그래, 한주는 조금 특별한 사람 이였지. 내게도. 미소가 좋아서 나를 보고 많이 웃어줬으면 했지. 목소리가 좋아서 언젠가 내 이름을 ‘이수’라는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하고 바랬는데. 눈을 감았다. -내가 커서 심장을 나눠 줄게. 하지만 넌 너무 지독한 방관을 해버렸어. 널 때린 다면 이세도 슬프겠지만 나도 조금은 슬퍼질 것 같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한주도 나도 말이 없었다. “잠시만.” 한주가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꽃집? “어머, 학생. 오늘은 일찍 오네? 늘 늦은 저녁시간에야 오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아는 척을 해온다. “아, 예.” “오늘은 무슨 꽃으로 줄까? 석달이 넘게 하도 종류별루 사가니까 이제 내가 헷갈리네. 들국화는 얼마 전에 가지고 간 것 같고.. 안개꽃은 어때? 흔한 꽃이지만 안개꽃도 다발로 만들어 놓으면 아주 예뻐.”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익숙한 듯 주인집아주머니가 포장하는 걸 보고 있다. “설마 이세의 병실에 꽃을 보내던 사람이..” 하루도 빠짐없이 - 아무 말 없이 아주머니에게서 꽃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선다. “특별한 의미는 없어.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야. 죄책감은 아니지만 동정이랄까.. 지금은 더 수긍이 가는..” 울컥했다. “왜 나한테 그런 변명 같은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 간다!” “네 얼굴에 궁금하다고 써있었으니까. “하?” 한주가 내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보고 웃는다. 그런 녀석을 보니 더 어의가 없다. “뭐든 물어. 그럴 권리가 있어, 너는.” 무슨 권리를 말하는지 모르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한주가 병실 앞에 잠시 멈춰섰다. “매일 닫힌 문만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갈려니까 왠지 이상한 기분이네.” “이세가 기다려, 빨리 들어가.” “너.. 이름이 뭐지?” “.................?” “본명말야.” “한이수.” “아- 이수. 이수였구나. 어울려.” 달칵 - 병실 문을 열었다. “평생 못 잊겠지.”라고 중얼거리고며 병실로 발을 내딛는다. [최 한 주] 현랑이 녀석과 ‘뮤즈’에서 엎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 지윤이가 혼자서 부산 친척집으로 놀러가는 바람에 오늘은 free라며 늦은 시간까지 붙잡는 바람에 드물게 ‘뮤즈’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나 화장실 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가려는데 민수와 마주쳤다. “야, 너 왠일이냐? 이렇게 늦게?”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온다. 민수는 선배에게 사랑받고 후배에게 존경받는 요즘은 보기 드문 호인 이였다. 나 같은 아웃사이더랑은 완전히 딴 판이라고 해야하나? “현랑이랑 술 마시다가 잠들었어.” “뭐? 현랑이 그 자식이 술먹다가 잠들었다고? 풉- 그 새끼 완전히 밑 빠진 술독인데. 너도 참 대단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몇 분하다가 화장실에 간다며 내가 먼저 움직였다. “아참, 너 저쪽으로는 가지마라.” 민수가 안쪽 홀을 가르킨다. 웅성웅성 사람이 제법 모여 있다. “왜?” “형준이가 왠 남자애하나 데리고 와서 여자애들 앞에서 스트립쇼중이시다. 지윤이가 있었으면 현랑이가 강제로라도 못하게 했을 텐데 뮤즈가 무슨 변태영업소도 아니고, 보고 있는 녀석이나 시킨다고 하는 녀석이나.” 민수는 혀를 차며 자신의 후배가 부르는 곳으로 가버렸다. 뭐, 형준이가 무슨 짓을 하든 내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끝이다. 이건 내가 성제고의 짱을 포기했을 때 이미 결정된 일이기도하다. 별 생각 없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와 부딪히고 풀썩하고 잠이 들어버린 것 같다. “........ 야? 괜찮아...”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이제야 술기운이 도는 모양인지 도무지 눈이 떠지질 않는다. “성제고 최한주잖아. 이 녀석 형준이 옆에 데려다 놔라. 형준이가 알아서 집에 데려다 줄 거야. 아니면 한주 얼굴에 목숨 건 기집애가 데리고 가던가 하겠지, 뭐. 쿡쿡-” 아마 세윤이 목소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지나고 나서야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간신히 눈을 떴다. “....음.......” 목이 좀 마르다. “어, 한주야 일어났냐?” “어....... 물 좀 줘.” 곽현이였다. 정민이도 보이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물을 마시고 나서야 애들이 모여서 시끌 거리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였다. 옷을 홀딱 벗고 테이블 위에 올라앉아서는 안스러울 정도로 떨고 있다. 누구지........ 하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내가 수학책을 줬던 1학년이라는 걸 알았다. 커피를 쏟았었지- 하고 생각하는데 형준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기는 놈한테 오늘 밤 저 새끼 빌려준다.” 뭔가 게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혜영아, 이 새끼 화장 좀 시켜봐. 그래야 좀 할 맛도 나지.” 기집애들이 구경났다고 좋아서 난리다. 한심해서 하품도 안나온다. “내 교복 빌려줄게. 세일러복이라서 무슨 코스프레한 것 같을 거야.” “안에 아무것도 입히지 말고 다리 벌려서 앉아있으라고 해.” “그거 재미있겠다. 너 마스카라 가지고 있어? 나 파우치를 두고 와서.” 형준이 여자친구인 혜영이라는 기집애와 그 기집애 친구로 보이는 두 기집애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1학년을 끌어내린다. 울면서 저항하는 것 같았다. 저항하자 멀리 앉아있던 형준이가 일어나선다. “야, 기집애들 나가있으라고 해.” 형준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홀에 있던 기집애들이 쫓겨나간다. 우당탕 - 테이블에 있던 1학년의 머리채를 잡아서 강제로 끌어내리고는 그대로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바지를 끌어내린다. 아 아악 - 악- 비명이 들렸다. 술 때문에 머리가 울린다. 질퍽한 형준이 녀석의 신음소리도 들렸다. 아, 미치겠네. 강제로 당하는 1학년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남이 정사장면을 보는 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여서 였다. 만약 - 그때 이세가 신경쓰여서 내가 '미치겠네'라고 생각했다면 어쩌면 말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이 한명씩 한명씩 녀석을 안았고 어느사이엔가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자 ‘기절한 모양이네.’ 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머리가 울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내게 한이세는 그 정도밖에는 안되는 녀석 이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엔가 매점에서 녀석을 봤었다. “저...... 최한주였죠, 선배 이름이.” “응.” 목소리가 이랬구나. “수학책은 너무 잘 보고 있어요.” “다행이네.” “네... 정말.. 다행이에요.” 수줍게 웃는다.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세와는 자주 마주쳤었다. 그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도와달라거나 힘들다는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곤 했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라던가 선생님, 같은 반 아이들의 일.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감이 왔다. 날 보던 기집애들과 한이세의 눈이 닮아있다는 걸. 사랑해 - 사랑해 -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25 (완) 나한테 천국은 어디일까? 지금은 이곳이 지옥이 아니기 만을 빌어. [한 이 세] 비록 굴욕적인 모양새지만 내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하는 ‘마음’ 내게 그는 그 ‘마음’의 전부였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목 타는 그리움, 밀려오는 행복감.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만 있으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은 내 것이니까 반드시 이 마음만은 지켜내고 말거라고 생각했었다. -빨아서 수건으로 만들어오면 생각해보지. 난 걸레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다. 내가 사람인 걸 부정당했고 내 마음을 부정당했고 심장이 멈춰버렸다. 난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었다. 달칵- 하고 병실 문이 살짝 열렸다. 이수형은 방금 나갔으니 이수형일리는 없고 아빠일까?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든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모르는 얼굴이다. 가족 외에는 딱히 병문안 올 사람이 없는 나였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해갔다. “누구세.........” 하지만 곧 휠체어를 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얼어버렸다. 하 정 민 - 식은땀이 전신을 적시는 것 같다. 구토가 몰려왔다. 눈앞 세상이 색을 잃어버린다. 온통 흑빛.. 지독한 흑빛이다. 순간 병실에는 침묵이 마치 공기처럼 흐른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침묵을 깨고 휠체어에 타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정민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한이세군이죠? 전 정민이 형인 하정우라고 합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사진관을 하고 있는 형이 있다는..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건 시기를 따질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우리 정민이가 이세군에게 했던 일을... 전부 들었습니다. 정민이는 내가 키운 것과 다름이 없어서 부모 된 심정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힘겨운 표정으로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뒤에 서 있던 정민이 당황하며 부축하려는 걸 저지한다.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옥은 이렇듯 쉽게 현실이 된다.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전 우리 정민이가 평생 이 짐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무릎을 꿇었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몇 년이 돼든 그렇게 해서 이세군의 마음이 편해지고 우리 정민이를 용서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진심이라는 걸 안다. 이수형과 꼭 닮은 지독한 애정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용서가 될 수 있을까? 정민이 몇 년간 법의 처벌을 받는다고 내가 받은 상처가 치유될까? 정민은 또 그 일을 위안삼아 내게 한 일을 잊을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법의 처벌을 받는 다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할 것이고 그도 내게 한 일을 잊을 수 없겠지. “하지만 이세군이 용서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아요. 악몽처럼 몸이 다시 기억해내는 아픔일 텐데 어떻게 쉬 잊어질거다, 잊어달라고 하겠습니까. 평생이 걸리더라도 용서를 빌겠습니다. 잘못을 알고도 용서도 빌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우리 정민이를 봐주세요. 빌고빌고 빌어서 언젠가는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우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차가운 병실 바닥을 적신다. 톡- 톡-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에 검은 자욱을 남긴다. 정민이는 내게 이렇게 지독한 짓을 하고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난 지독한 짓을 당하고 마음속의 그도 잃었는데.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것도 없이 그를 잃었는데. 눈을 감았다. 내게도 차가운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눈물은 다른 이의 눈에 보이는 눈물이 아니라 영혼이 우는 거다. 그를 잃은 영혼이. “너에게 했던 일을 절대 잊지 않겠어. 난 기억 날 때마다 네게 용서를 빌 거야. 네게 용서 받을 때까지 빌 거야. 그래서 우리 형이 나 대신 받은 내 죄 값을 갚으마. 내가 우리 형한테 죄 값을 갚을 수 있는 길은 네게 용서 받는 것 밖에는 없어.” 정민도 고개를 땅에 닿을 만큼 깊게 숙인다. 꽉진 주먹과 비장한 표정에서 뭔가 있었던 것 같다. 정우가 대신 받은 죄 값이라는 건 또 뭘까. 눈을 감은 채로 베게에 머리를 묻었다. 잠이 쏟아진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지미형이 마치 병실로 돌아왔고 그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이 돌아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잠들어 있는 척했다. 깊이 아주 깊이 잠든 척했다. 지미형의 차가운 손이 내 머리를 쓸어주어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분명 좋은 꿈을 꾸겠지. 그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악마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 The end -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외전] 2 쿵 쿵 - “이수군 기숙사내에서 그렇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죠?!” 날카로운 사감선생의 목소리도 내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 너 오늘 잡히기만 해봐라! 손에 들린 포스터를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렸다. 에자키 료우지 - 한 이수 라고 적힌 기숙사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거친 숨소리와 내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놈들이 둘 있었으니 머리에 핏줄이 선다. “야, 너 내가 이 방에서 그 짓하면 죽인댔지?!” 달려들어서 료우지 녀석 얼굴을 다짜고짜 두둘겨 팼다. 기분도 안 좋은데 딱 걸렸어, 너. “꺅 - 료우지.” 비명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상대가 또 누구야? 일편단심 니노미야가 불쌍해지는 순간 이였다. 료우지는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사쿠라고 최악의 바람둥이였다. “싸.. 싸이코.. 한...” 파랗게 질린 얼굴의 주인공은 분명히 1학년의 엔리코였다. 얼마 전에 타카시가 모델로 쓰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동그란 눈, 하얀 몸, 붉은 입술 - 하지만 감히 니노미야와 비교한다면 니노미야에게 미안할 정도다. 니노미야에 비교하면 엔리코는 애다, 애. “너도 참 낯짝이 두껍다, 료우지. 니노미야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 별루.” 멱살을 다시 고쳐 쥐고 구겨져있던 포스터를 료우지 얼굴에 철퍼덕 붙여줬다. “뭐야?” “타카시 어딨어.” 타카시 이름이 나오자 얼굴을 찌푸리며 포스터를 펴서 본다. “풉 - ” “웃지마, 또 한대 맞는 수가 생겨.” “세상에 - 하하하하하하하 이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났냐고? 우리학교 게시판에서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더라!” 구겨진 포스터는 다름 아닌 사진부의 포스터였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입회 권유 포스터! 포스터에는 글래머에 세일러복을 입고 윙크하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 합성 되어 있었는데 그 여자얼굴이 다름 아닌 나였다. 감히 내게 이 짓을 할 사람은 타카시 유하밖에는 없다. 녀석은 개인 화실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였지만 이상하게도 사진부 소속 이였다. “두 번 묻게 하지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료우지가 웃음을 멈췄다. “몰라 - 나도 모른다고. 어디 스케치여행이라도 갔겠지. 사실 너한테 이 짓하고 얌전히 학교에 있을 바보도 아니고. 풉 -” 연신 포스터를 보며 웃기 바쁜 료우지. 가보로 삼고 싶다느니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팼다. 천하의 한이수를 뭘로 보고 - 성난 파도처럼 타카시가 있을 만한 곳을 휩쓸고 다녔지만 한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수 - 아직도 타카시 찾고 있어?” 구내식당에서 니노미야를 만났다. 길고 섬세한 흰 손, 버릇처럼 내려 감는 눈, 긴 속눈썹, 촉촉한 입술, 가느다란 목줄기 낮고 성량이 깊은 목소리는 도저히 같은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성이라는 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거야. 아무렴 - 이런 니노미야가 료우지에게 목을 메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나다. 언제였던가 료우지가 옆 학교 여학생이랑 호텔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었는데 니노미야는 침착하게 피임은 확실하게 했느냐고 물었다. 료우지가 물론이라고 대답했고 니노미야는 아이 따위가 생겨서 널 뺏기는 바보 같은 일은 제발 없게 해달라고 했었다. 내가 너무 어의가 없어서 ‘신파다, 신파. 눈물도 안 나는 신파.’라고 니노미아를 핀잔준 일이 있었다. 니노미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료우지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넌 몰라, 이수. 죽어도 넌 모를 거야. 슬퍼서 죽을 것 같은데도 그가 없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내 기분을 넌 죽어도 이해 못해.’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그 새끼 이름은 당분간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은 새끼.” “그럼 이 편지 안 전해줘도 되는 거야?” “편지?” “응, 타카시가 보냈어.” 니노미야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이수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가 웃으면 지는 거야. 네가 이긴다면 원하는 걸주겠다. 장소는 루아의 갤러리다. 타카시 유하로부터 후루룩 - 급하게 라면정식을 먹어치우고 니노미야에게 오늘 늦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9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으면 외출계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타카시 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결투장을 보낸 걸까?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내가 짐 캐리를 봐도 잘 안 웃는 사람이네 - 원하는 걸주겠다고? 네 녀석의 목숨을 거둬가주마 - 히히히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며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 밟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루아의 갤러리는 타카시 소유로 된 화실 겸 카페였다. 루아는 타카시 어머니의 이름이다. 갤러리에는 우아한 화이트 톤으로 은은한 조명이 차가운 화이트를 따뜻하게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이 내게 향하는 걸 느꼈다. “세상에 - 저 사람.” “맞지? 맞네.” “너무 좋겠다.” 뭐라는 거............. 사진 이였다. 커다란 사진. 깊은 잠에 든 내 사진 이였다. 푸른빛의 숲과 짙은 녹음의 그늘 - 책과 내가 있었다. 상냥한 바람이 사진에 갇혀버린 것 같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타카시의 그림에 있는 행복이 그 재능을 감추지 못하고 사진에도 전해져있다. “마음에 들어?” “너.. 이 자식...........” 타카시가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 안 웃었어.” “좋아, 약속이니까 원하는 걸주지. 뭘 줄까? 내 목숨? 능지처참이라도 하려구?” 느린 동작으로 자신의 목에 손을 놓는다. 아, 얄미워. “사.. 사진 줘. 저 사진 말야.” 그렇다, 녀석의 재능은 이렇게 녀석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대단하다. 한대라도 패야지 속이 시원할 텐데. “너.. 이 결투에서 져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으르렁대자 타카시는 손을 저으며 사진을 포장한다. “설마?” 묘한 웃음을 흘리지만 녀석은 분명 알고 있었던 거다. 예술은 목숨을 구제한다. “아참, 포스터 다시 만들었는데 괜찮지?” 퍽 - 머리를 사정없이 패버렸다. 이제 좀 속이 편해지네. “절. 대. 로. 안. 돼.” “냉정해, 나의 예술을 넌 이해 못하는 구나.” “오늘 살아서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으면 그 입 다물라.” ---------------------------------------------------------- 이수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수 이야기를 해달라는 분이 좀 있으셔서 신경 써서 썼는데 어째 쫌 어색하네요. 급조해서 그런가? ^^; 예쁘게 봐주세요.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 외전3 “무슨 학교가 이렇게 넓은 거야!!!!!!!!!!!!!!!!!!!!!!!!!!” 정문에서 학교구조도를 보고 왔는데도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녹음이 짙은 숲은 끝이 없고 아무리 걸어도 거기가 거기인 것 같았다. 하긴 산을 포함해서 부지가 10만평이 넘는다고 했었지. 헤매는 건 딱 질색인데. 현기증이 일 만큼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명문사립 사쿠라학원재단의 고등학교 편입시험을 치루기 위해 학원 내를 자그마치 10분이 넘도록 헤매고 있었다. 어찌된 노릇인지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질 않는다. 여기서 내가 죽어도 1년 후 쯤에나 발견해줄려나?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18년을 살았는데 원대한 내 꿈을 세상에 내보이기도 전에 겨우 고작 편입시험 치르러왔다가 학원에서 죽다니. 아무도 내 죽음의 이유를 알려고 하지마라, 쪽팔린다. “내가 죽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거나(아직은 없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거나(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일터인데(네가 사라지는 것이 곧 일류의 평화) 슬프고 슬프도다......................” 대성통곡을 하며 절망의 늪에서 한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얕은 신음소리와 ‘으... 이제.........그만... 싫어....’ 뭐 이런 소리. 사람이다!!!!!!!!!!!!!!!!!!!!!!!!!!!!!!!!!!!!!!!!!!!!!!!!!!!!!!!!!!!!!!!!!!! 신나서 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수풀을 헤치고 겨우 소리의 근원지에 도착한 나는 잠시 얼어버리고 말았다. 웬 사내 녀석 둘이 묘한 자세로 엉켜서 자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한 놈은 옷을 완전히 다 벗은 상태에 신음소리를 흘리며 밑에 깔려있었고 다른 한 놈은 구김하나 없는 옷을 금색의 휘장이 박혀있는 마이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깔려있는 놈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 “................................” 깔려있는 놈과 내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할말이 없었고 “구경 계속할건가?” “...............................” 위에 놈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미안한데 말이지....... 내가 길을.......” 겨우 이성을 차리고 손등으로 이마의 황당함을 훔쳐내고 있는데 “아님 너도 나랑 하고 싶어?” “난 3P는 싫어.......... 료우지............” 깔려있는 놈이 위에 료우지라는 놈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3P? 그게 뭔지? 난 지금 쟤들이랑 같이 장난칠 시간이................... 잠깐... 이 상황에서 3P라면 혹시?!!!!!!!!!!!!!!!!!!!!!!!!!!!!! 눈에 화르륵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키가 싫다는데.” 깔려있는 놈 이름이 유키로군. “뭐...... 료우지가 꼭 하고 싶다면.....난.... 괜찮아.....” 유키는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부끄러운 듯 료우지의 목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눈을 감고 누웠다. 갈수록 가관일세. “이 씹새꺄, 너희 둘 다 오늘 세상 구경 다 한 줄 알아.” 료우지라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서 사정없이 얼굴을 두들겨 패버렸다. 유키라는 녀석은 때리기도 전에 ‘료...... 료웆.......’이라며 기절해버렸다. 신나게 두들겨 패고 나서야 내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과 이 둘이 10분 만에 만난 최초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으악!!!!!!!!!!!!!!!!!!!!!!!!!!!!!!!!! 돌아버리겠네!!!!!!!!!!!!!!!!!!!!!!!!!” 료우지 녀석의 배를 한대 더 걷어 차줬다. 쓰러져버린 녀석의 얼굴은 마치 깊은 잠에 든 것 같이 편안하다. 아무리 봐도 오늘 안에 깨기는 글렀구나 싶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슨 마가 끼인 게 분명해. 편입시험 치기는 글렀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낮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의.................. 살았다. 미친 듯이 뛰어서 건물에 앞에 도착했다. ‘고등부 동기숙사’ 오예, 그럼 그렇지. 천하의 한이수가 이대로 무너질 턱이 있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큰소리로 건물이 떠나가라고 웃었다. 그때 웃음소리를 듣고 내 눈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허리까지 기른 갈색 머리를 노란색 손수건으로 묶고 안경을 쓴 자주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외. 계. 인. 아니 외계인은 아닐지 모르겠다. 사쿠라고의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오늘 편입시험 보러 온 건가?” “어...... 엉...” “그럼 날 따라와. 데려다 줄 테니까.” 순순히 따라나섰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목소리에 왠지 거절하지 못할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한참을 걷자 큰 건물의 외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벽에는 ‘낙 서 금 지’ 라고 써있었다. 얼마 전에 다시 페인트칠을 한 모양인지 하얀색이 깨끗하다. 우뚝 - 교복을 입은 외계인이 멈춰 섰다. “낙서 금지라고?” 희죽거리며 웃는다. 유심히 벽을 만져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주머니에서는 목탄이 나왔다. 저런 걸 왜 들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는 목탄으로 하얀색 벽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 기쁜 듯 반짝이는 눈 - “저기..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려봤자 조만간 또 페인트칠을 해버릴 텐데?” “요는 지울 수 없게 만들면 된다는 거지.” 내게 윙크를 하고는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교복 입은 외계인의 미소에는 자신감마저 넘친다. 하지만 절대로 지울 수밖에는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남학교인데 녀석은 키스 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림이 완성이 되면 될 수록 눈을 뗄 수가 없었고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불안해졌다. 키스 - 키스 - 키스 - 내 머리에는 온통 이 단어가 가득 찼다. 분명 연인들의 키스는 아니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과의 관능적인 키스 사신의 칼날이 목에 드리워지는 순간에야 그 사랑의 위험을 깨우치는 두 사람. 키스하는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는 여자의 연인 손에는 칼자루가 들려있다. 키스는 영혼을 잠들게 하고 육체를 깨운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런 그림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교복 입은 외계인은 ‘타카시 유하’라는 싸인과 ‘진정한 키스는 입술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문구까지 휘갈겼다. 멈춰서버린 나와 배를 잡고 웃는 타카시. “교장이 내일이면 날 찾아와 또 온갖 구박을 해대겠군.” “확실히............” 지울 수도 지우지 않을 수도 없는 그림 - 마치 도박을 하는 것처럼 타카시는 즐거워했다. 목탁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잊고 있던 편입시험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너 웃기는 녀석이구나. 보통 같으면 혼자라도 교실을 찾아갔을 텐데.” “네 노래에 발목을 붙잡혔었거든.” “노래?” “그래, 넌 꼭 인어 같아. 노래로 남자를 유혹해서 바다에 빠져들게 만드는 인어. 대신 넌 그림으로 유혹하고 난 죽음대신 편입시험에 늦어버렸고.” “쿡쿡 - 맘에 들었어. 힘들겠지만 꼭 합격하길 바란다.” “좋아, 저 키스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악수를 하고 타카시와 헤어지고 간신히 나는 편입시험을 치룰 수 있었고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입학했다. “기숙사에 비어있는 방이 하나뿐이라서 어쩔 수 없군요.” 기숙사사감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날 노려보더니 “뭐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라며 방을 안내했다. 그럼 2인실을 계속 혼자서 쓰는 녀석이 있다는 말이야? 보통 같으면 칼을 맞아도 예전에 맞았을 텐데. 예사 녀석은 아닌 모양이군. “에자키군은 오랫동안 혼자서 방을 써왔으니까 조금 불편한.....” 에자키 료우지라고 적힌 기숙사방의 문에 노크를 한다. 료우지? 하하하하 -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내가 그때 두들겨 팬 녀석이랑 이름이 똑.......... 달칵 - 문이 열리고 온 얼굴에 반찬고를 덕지덕지 붙인 녀석이 얼굴을 내민다. 오, 마이갓! “너................?” “아.. 안녕! 하하하하하하 - 너무 반갑다.” 에자키 료우지 - 한이수 나란히 명패가 놓이고 이렇게 녀석과 나는 같은 방을 쓰게 됐다. -------------------------------------------------------------------- 타카시가 그린 키스신의 묘사는 ‘그림속의 연인들’이라는 예담에서 출판된 책의 내용 중에서 갈취하여 조금 더 제가 보태 썼습니다. 죽음을 부르는 키스! 너무 좋아 ^^* 그럼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행복해지세요. 악마 같은 나의 고등학교 다시 다니기 외전 -4 내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랑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어. 뭐 꼭 이름을 붙이자면 브라더 콤플렉스정도? 나만의 너이길 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렇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포기되지 않는 내 감정이 제발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지. [하 정 우] “뭐 불편한 건 없어?” 하얀색 가운을 입은 서진이 이미 열려있는 병실 문에 노크를 하며 차트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의사로서 간단한 질문을 한 뒤 친구의 얼굴로 돌아와 내 침대 옆의 의자를 끌어다가 앉는다. 서진이는 중학교동창으로 지금도 나와 서진이, 태주 이렇게 셋이서 자주 어울려서 놀러 다닌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인기 있던 녀석이 서진 이였다. 부잣집 도련님에 의대생 이였으니.. 쿡.. 내가 지금 입원해있는 병원도 서진이 아버님 명의로 된 제법 규모가 큰 개인병원이다. 뭐, 정형외과 전문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알다시피 난 정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환자다. 산부인과(?)나 종합병원에 있어야할 처지인데 그래도 친구랍시고 이곳에 입원을 시켜준 것도 서진 이였다. 얼굴이 차갑게 생겼고 말을 싸가지 없게 해서 그렇지 사실은 좋은 녀석이라는 걸 안다. 사진관에서 그 일이 있은 후에 정민이 생각나는 사람이 서진이 밖에 없었는지 나를 업고 이 곳으로 왔었다. “응, 너무 편해서 아주 눌러 살고 싶을 지경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웃자 서진이 한숨을 쉰다. “제수씨는?” “소영이는 지금 친정에 가 있어.” “하긴 알리고 싶지 않겠지.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서진이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정민이랑 셋이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 내가 데리러.........” “소영이랑은........ 이혼할 생각이야.” 내가 서진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소영이가 이 일을 알아? 그래서 이혼하자고 그래?” “아직은. 하지만 말할 생각이야.” “일부러 왜 그런 짓을 해? 설마 정민이 때문이야?” 당황한 얼굴이다. 하긴 소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 당황할 만도 하다. ‘.. 두번째라도 좋고 세번째라도 좋아요.. 곁에 있게만 해주면 안돼요? 나 정우씨가 없으면 울다가 죽어버릴 텐데..’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깨지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 나한테 그랬었지? 혈연(血緣)이라고. 정민이가 죽도록 소중한 건 내가 정민이와 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내 아이가 생기면 정민이한테 느끼는 지독한 혈연도 조금은 옅어질 거라고. 하지만 틀렸어! 소영이가 임신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했는데도 그런데도 난! 아직도 난.. 정민이 밖에는 걱정이 안돼. 임신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충격 받을 소영이보다.. 정민이가 걱정돼서 미치겠어. 난 그 애가 불행해질까봐 걱정돼서 미치겠어. 소영이랑은 여기까지야. 인연이 아닌 걸 억지로 질질 끌 수는 없어. 내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럼 애는? 애는 어쩌려고 그래. 너 왜 그렇게 못돼먹었냐? 서진이 화난 얼굴로 내 멱살을 잡는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야? 네 욕심이 정민이까지 망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언젠가는 정민이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길 텐데 그땐 어쩌려고 그래?!” 퍽!!!!!!!!!!!!!!!!!!!!!!!!!!!!!!!! 갑작스레 서진이 얼굴로 날아든 주먹에 나도 서진이도 놀래서 눈을 크게 떴다. “서진형, 그 손 놔요!!!!!!!!!!!!!! 형이라도 우리 형한테 그러면 용서 안해.” 언제 돌아왔는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정민이 나를 감싸고 서진이를 노려본다.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지만 나 때문이라면 나한테 소리쳐. 날 때리란 말이야. 내 멱살을 잡아. 왜 자꾸 우리 형한테 난리야?! 왜 그러냐고!” 서진이 하- 라고 어이없는 웃음을 짓더니 “너희 둘은 똑같아. 정말 재수없을 만큼 닮았다고.” 라며 병실을 나갔다. 정민이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미안......... 미안........ 정말 미안.............”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울면 내가 힘들어져, 정민아. 알지? 정민이가 울면 형이 더 많이 아픈 거. 그러니까 울지 마.. 날 아프게 하지 마..” 세상에 남겨진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을 때 넌 아주 작았지만 확실하게 내게 네 존재를 알려 왔었지. 남의 손에 널 맞길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했었어. 15살짜리 중학생이 무슨 고집으로 5살짜리를 학교에 까지 데려가면서 돌보냐고 차라리 어린이 집이나 친척집에 맞기는 편이 정민이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겠냐고 했었지만 내 욕심에 그러질 못했었어. 오히려 미안한 건 나야. 정민아. ‘나.. 임신했어...’ 많이 취해서 소영이랑 잤던 걸 하룻밤 불장난으로 끝내 버리려던 내게 청혼까지 하게했던 건 그 욕심이 끝나길 바래서였어. 서진이 말처럼 혈연이라는 게 이 지독한 욕심의 원인이라면 제발 그렇게 해서라도 옅어지길 바랬어. 내 프로포즈에 눈물까지 흘리며 고맙다고.. 고맙다고 하던 소영이를 평생 사랑으로 갚겠다던 소영이를.. 난 결국 이런 식으로 버려야 하는 거겠지. 지독하게 이기적인 나.. 너 밖에는 지킬게 없는 나.. 난 참 못 쓸 놈이지.. --------------------------------------------------------------------